아주 대중음악의 전시장 방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말레이시아 abu국제가요제를 보고…>
문화적 배경과 언어가 각기 다른 나라의 대중음악들이 한자리에서 어떻게 공감대를 이뤄낼 수 있는가.
국제가요제의 본질이자 목적인 이러한 기대는 현실적으로 열매맺기 쉽지 않다.
24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ABU(아시아·태평양 방송연맹) 국제가요제는 여러 부류의 참가음악들로 아시아 대중음악의 전시장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이 가요제는 ABU 비회원국인 핀란드를 포함, 세계 17개국의 작곡자·가수가 참여함으로써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가요제에 대한 관심도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말레이시아 최대 명소인 메르데카 홀(독립회관)에서 열린 이 페스티벌에는 5천여 관객이 운집했다. 유럽이나 일본·한국 등에선 국제가요제가 거의 흐지부지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레이시아 언론은 10여일 전부터 이 행사를 대대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 속에 이 페스티벌에 참가한 노래들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졌다.
서울국제가요제·동경가요제 등을 경험한 한국·일본의 참가곡과 북구의 핀란드 참가곡은 비교적 최신 경향의 리듬과 분위기를 강조한 편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복잡하고 세련된 리듬에다 호소력이 강한 신곡 『사랑은 차가운 유혹』을 들고 나온 양수경과 백보컬리스트들은 미국식 스탠더드 팝송·민속음악 등만을 들어온 말레이시아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가요제 심사위원장이자 말레이시아의 유명한 싱어송라이터인 와 이드리스씨는 『한국 참가곡은 잘 들어보지 못한 분위기이나 편곡과 무대연출이 뛰어나 충격적이었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일본의 17세 소녀 나오카는 장중한 오키스트라 편곡에 힘입어 청중들의 관심을 끌었고 핀란드의 참가곡 『페기』는 고급 록음악이었다. 이와 함께 가창상을 차지한 필리핀의 그룹은 13∼17세의 소년들이 「뉴키즈 온더 블룩」이나 「소방차」를 연상케 하는 음악을 연출해냈다.
현지에 임원·심사위원으로 온 각국의 음악전문가들은 이들 나라의 음악들은 각기 자국의 음악수준을 솔직히 보여준 비교적 앞서가는 음악으로 분류하고 있다.
미국식 팝을 주류로 하면서 대중음악 저변이 매우 넓은 호주는 의외로 한국에서 70년대 가요제 참가곡의 주류를 이뤘던 노래들처럼 고전적 스타일의 스탠더드 팝을 선보였다. 작곡상을 받은 호주의 『노래처럼(Like A Song)』은 자국의 특성을 내보였다기보다 지나치게 점수를 의식했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이 같은 호주 참가곡의 경향과 비슷하게 「이전에 많이 들었던 것 같은」노래로 입상을 노린 참가자들이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중국·싱가포르·브루나이 등이었다.
한편 이와 동떨어진 세 번째 부류의 음악은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인도·파키스탄·스리랑카·이란 등의 서아시아 음악들이었다. 처음 보는 민속음악악기로 일종의 제식과 같은 음악을 보여준 이들 참가곡들은 공감대 형성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만 머물렀고 상업적 성공을 노리는 이 가요제에서는 비교적 왜소해 보였다.
찌는 듯한 더위를 씻을 수 있는 시원한 리듬을 좋아하는 동남아인들은 미국의 스탠더드 팝보다는 강력한 리듬앤블루스의 음악들이 대종을 이루었다. 이날 특별공연에 선보인 말레이시아 음악인들의 연주는 하나같이 남국의 토속 리듬과 시원스런 록이 뒤섞인 형태였다.【콸라룸푸르=제규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