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지존도 '코치'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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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창호 9단의 바둑은 다른 프로들, 특히 중국 기사들의 집단 연구에 의해 철저히 분석되고 해부됐다. 도무지 찾을 수 없던 이창호의 약점이 점차 선명하게 드러났고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느 코스로 움직일지 예측 가능하게 됐다. 이는 이창호 9단이 최근 고전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반면 이 9단은 홀로 움직인다. 나이가 들면서 과거처럼 젊은 기사들의 연구모임에도 거의 나가지 않는다. 추격해 오는 세력들에 비해 상당히 불리한 입장이다. 혹 이창호 같은 절세 고수에게도 그의 약점을 잘 관찰해 교정해 주는'코치'가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은 아닐까.

'코치'는 프로바둑에서 아주 생소한 개념이다. 이창호-이세돌 같은 고수들에게 누군가 바둑의 전략 전술에 대해 얘기한다는 게 '불경'으로까지 비치는 동네다. 바둑은 오직 판에서 해결할 뿐이라는 게 전문기사들의 오랜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속기시대가 도래하면서 바둑계에도 서서히 코치 필요론이 대두되고 있다.

양재호 9단

양재호 9단은 "바둑도 골프와 마찬가지로 선수들의 기술적인 치료는 물론 정신적인 치료가 꼭 필요한 종목이다. 이창호.이세돌 같은 정상급도 다 문제를 가지고 있고 곁에서 보면 그게 보인다. 하물며 그 아래의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고수를 감히 누가 가르치냐고 생각해선 안 된다. 강동윤.이영구.윤준상 등 신예 강자들은 장점과 약점이 뚜렷한데 본인 스스로 고치려면 오래 걸린다. 고쳐 줄 능력 있는 사람이 옆에서 도와주면 좀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권갑룡도장으로 유명한 권갑룡 7단은 약간 다른 관점에서 코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중국은 구리(古力) 같은 일류기사도 중국기원에 반드시 출근해 집단연구에 참여한다. 여기서 수많은 포석의 유형이 연구되고 기존 포석을 파괴할 수 있는 신수법이 연구 된다. 지난번 삼성화재배 결승 1국에서 창하오(常昊) 9단이 이창호 9단에게 쓴 포석도 그중 하나였다."

권갑룡 7단

"상대방에게 알맞은 포진 등 전략 전술을 사전에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한국리그 등 속기에선 판에서 생각하는 게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전 대비가 절실한데 이를 맡아주는 게 코치의 역할이라고 본다."

히딩크 감독이 일류선수는 아니었지만 팀을 지도하는데는 특출하다는 점,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가 코치를 찾는 점 등도 바둑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바둑도 야구처럼 전략.전술의 유형에 따라 승률을 분석하거나 개인별.포진별 승률 등을 잘 기록하면 어떤 상대에게 어떤 전술이 유용한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바둑의 인기를 높이는데도 꼭 필요하다. 한국기원 제도 개선 등 젊은 프로기사들의 의견 반영에 앞장서온 양건 7단은 16일 한국기원 근처에 '양건 도장'을 낸다. 그냥 도장이 아니라 프로기사들의 정신적.기술적 개선을 위한 일종의 '클리닉' 역할을 하려고 한다.

"지금까지의 바둑이 천재들의 감각 우선으로 이끌어져 왔다면 이제는 체계적.과학적 접근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일류들조차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는데 그런 모델들을 찾아내 수정해 나가는 게 코치의 역할이라고 본다."

양건 7단

"프로기사마다 어떤 때는 쉽게 두는데 어떤 때는 괴로워하며 둔다. 속기 시대라 이런 현상이 쉽게 목격된다. 바로 어떤 때가 괴로운가에 본인의 약점이 숨겨져 있는데 본인은 모른다."

'훈수는 뺨이 석대'라는 속담이 있다. 바둑엔 훈수가 금물이며 바둑계는 지금껏 그런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코치를 논외로 여겨왔으나 속기시대의 영향으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골프의 타이거 우즈나 박세리 선수가 본인의 약점을 고치기 위해 코치를 찾듯 바둑의 이창호.이세돌 9단이 코치를 찾 는 그런 시대가 머지않아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식 도제 제도의 마지막 계승자라 할 조훈현 9단은 "바둑은 오직 본인이 판에서 해결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조훈현 9단

1990년대 일본에서 중국식 포석에 대한 승률조사를 했는데 백의 삼연성이 유일하게 50% 이상을 넘었다. 그런 식의 자료가 대국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삼연성 싫어하는 기사가 삼연성을 두겠느냐"고 반문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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