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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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대학·일반부 임정아 <서울구로구고척1동>
재작년 가을 감옥에 갇혀 있는 제자에게 이 책을 영치시키려다 거절당한 적이 있다. 『제가 두 번이나 읽었는데 꼭 넣어주고 싶습니다』며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지은이가 사상범이어서 그런가요. 그래도 시국에 관한 글은 없는데요.』
『아닙니다.』
이유는 단 하나. 책제목에 「감옥」자가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터벅터벅 되돌아 나오면서 저자의 힘있고 유려한 붓글씨로 쓰여진 책제목을 퍽이나 원망했었다. 그냥 「사색」이라든지,「신영복 편지글」 뭐 이런 식이었으면 좋았을걸 하며.
그러나 그것은 서울에서 광주까지 안고 갔던, 좋은 책을 넣어주게 된 기쁨이 글자 하나로 인해 그만 허망히 무너져 버린 데 대한 아쉬움 끝의 억지였을 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만큼 책내용에 걸맞은 제목도 흔치 않을 것이다. 감옥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겁고, 침침하고, 폐쇄적인 느낌이 사색이라는 청정한 낱말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이것이 이 책을 손에든 나의 호기심 어린 관심이었으며 그것은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첫 번째 놀라움은 감옥이라는 폐쇄공간에서 어쩌면 그리 열린 생각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주 작은 대상하나를 두고, 예를 들면 감옥의 참 밖으로 보이는 풍경 한 장면, 영치 들어온 복숭아 한 알…이런 사소한 사물들로부터 이모저모로, 또 여러 가닥으로 사고를 확대시켜 나가는 그 생각의 폭넓음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의 빈약함과 조급함을 한없이 부끄러워하며.
무기수라는 절망감과 절박함도 그가 가진 사고의 지평을 가두어둘 수는 없었을까. 더구나 그 사색의 편린들이 감옥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맑고, 밝고, 따뜻하고…. 또 때로는 온 몸으로 쓴 글들이 심금을 울려주기도 하고…. 나는 새삼 인간이 지닌 사고의 폭은 과연 얼마만큼일까를 가늠하며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문장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떤 글은 그대로 한 편의 산문시와도 같다. 물론 그 내용으로 본다면 한 마디 한 마디 주옥같은 잠언집이나 명상록이라 하면 어울릴 것이고.
이른바 「통혁당」사건 무기수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가장 고통스러운 속에서 나오는 평화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그의 계수씨, 형수님,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글로 짜여져 있다. 1968년,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전주 교도소에서 20년 20일을 복역하다가 1988년 가석방된 그가 얼마동안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썼을 때 그 글을 읽는 즐거움으로 나는 그 요일만 꼬박꼬박 기다리기도 했었다. 감옥에서 쓰여진 명저들이 떠오른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네루의 『세계사편력』,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도 옥중집필 부분이 있다. 비참한 감옥안에서도 소멸치 않은 고귀한 인간정신승리의 기념비적 유산이라 할 그 대열에 이제 이 책을 첨가해야할 것이다.
독서는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이 있다. 만의 하나라도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지만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책을 두고 말한다면 기꺼이 거기 따르겠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반복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의 내면은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쓸쓸한 세상에 살면서 스산하고 상처받은 가슴을 기댈 수만 있다면 인생의 낭비를 치르고라도 얻고 싶은 것, 그것은 평화와 관조 아니겠는가. 좀더 많은 이들이 욕망으로 점철된 비상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황폐한 가슴을 열어 이 책과 만난다면 세상은 좀 더 따스하고 부드러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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