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46년 만에 회장 못 뽑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27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 정기총회에서 차기 회장 물망에 오른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右)이 회장 추대에 사실상 반대표를 던진 대림산업 이준용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46년 만에 처음으로 차기 회장을 뽑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회장 선출 과정에서 회장단 내부의 반목이 고스란히 드러나 큰 상처를 입고 있다. 27일 서울 전경련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정기총회는 덕담이 오가고 사전에 합의된 사안을 박수로 추인해 온 예전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이준용(69) 대림산업 회장이 "나이 일흔이면 (회장을) 해서는 안 된다"며 말문을 열었다. "나에게도 전경련 회장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65세 때부터 '일흔 넘으면 전경련 회장 자리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이야기해 왔다…." 이 회장은 5분 이상 작심한 듯 신상발언을 쏟아냈다. 다분히 조석래(72) 효성 회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회장은 "내일모래가 환갑인 젊은 총수를 추천했으나 강신호(80) 현 회장이'그 사람 너무 젊지 않으냐'며 난색을 표시했다"는 은밀한 일화까지 공개했다. 전경련 지도부의 전면적인 세대교체를 공개적으로 주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회장의 돌출 발언으로 조석래 회장으로 기울던 차기 전경련 회장 선출 구도는 다시 안개 속에 빠졌다. 조 회장은 현 회장단 중 강 회장 다음의 연장자로 차기 회장으로 유력하게 꼽혔다. 혼란과 충격으로 회의장이 술렁거리자 '회장 전형위원회' 대표인 김준성(87) 이수그룹 명예회장은 "전경련의 위상이 더 이상 추락하는 것을 막으려면 오늘 회장을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40분간 전형위원들과 구수회의를 한 뒤 분위기가 달라졌다. 김 명예회장은 "늘 회장단이 충분히 의견을 수렴해 회장을 추대했는데, 이번에는 의견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며 회장 선출 연기를 선언했다.

이날 정기총회는 전경련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전경련에는 지난 한 달 동안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들이 꼬리를 물었다. 강신호 현 회장의 연임에 반발해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 부회장직을 사퇴해 파란이 일었다. 대림 이 회장도 김 회장과 더불어 전경련 개혁을 요구하는 대표적 인물로 꼽혀왔다. 이들은 '젊은 유력 그룹 회장을 앉혀 강한 전경련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중을 자주 내비쳤다. 그동안 '정부와 정치권에 당당한 목소리를 못 내왔다'는 게 불만이었다. 반면 강 회장을 비롯한 전경련 주도 세력은 여전히 '실용주의적' 입장이다. 강 회장은 이달 초 "(재계가) 정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나. 정부에 잘 협조하면서 정책을 바꿔나가는 게 옳다고 본다"고 말했다.

전경련은 1999년 김우중 회장이 대우 사태로 물러나고 중견그룹인 경방의 김각중 회장 체제가 들어서면서부터 '세'가 위축돼 왔다. 수도권 공장 신.증설 규제 등에서 재계의 입장을 제대로 관철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림 이 회장의 발언은 이런 위기의식의 표출로 해석된다. 효성 역시 상대적으로 그룹 규모가 작고(공기업 포함 자산순위 36위), 조 회장의 연배도 의욕적으로 활동하기에는 부담스럽지 않으냐는 재계 일각의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재계 내부의 반목과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이를 지켜보는 외부의 시선은 곱지 않다. 여기에다 주요 그룹 총수들이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거의 참석하지 않으면서 예전과는 위상이 달라졌다. 전경련이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전경련은 3월 중 임시총회를 열어 차기 회장 선출을 마무리짓겠다는 복안이지만, 앞길이 순탄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양호(58) 한진 회장, 현재현(58) 동양 회장, 김승연(55) 한화 회장 등 '젊은 총수'들이 차기 회장 물망에 오르내리지만 본인들은 대부분 고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권혁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