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133) 빅 초이의 풀스윙이 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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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초이' 최희섭(24)과 관련해 잊을 수 없는 장면 하나를 떠올리려 한다. 아마도 스쳐 지나가기 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기습번트다. 커다란 그의 체구를 떠올리면 마치 '코끼리 비스킷'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지난 8월 15일(이하 한국시간) 시카고 리글리필드. 7회말 컵스의 공격 때 선두로 나선 최희섭은 상대투수 댄 미셀리에게 초구 볼을 골라낸 뒤 2구째 기습번트를 시도했고, 투수앞 땅볼로 아웃됐다.

'인사이드피치'는 메이저리그 신인왕의 당찬 희망을 안고 시작한 최희섭의 2003년 시즌 모든 플레이 가운데 이 번트 하나가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눈물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4월 1일 뉴욕 메츠와의 개막전에서 터뜨린 2루타를 가장 오래 기억에 담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4월 5일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터뜨린 시즌 1호 홈런을 대표작으로 볼 것이다. 그를 전국적인 화제의 인물로 부각시켰던 6월 8일 투수 케리 우드와의 충돌 사태 역시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안타.홈런.부상의 순간보다 앞서 말한 '미완성 번트'가 더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다. 최희섭의 '안간힘'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날 선발 1루수로 기용된 뒤 2루타.삼진.볼넷을 각각 기록했다. 그리고 네번째 타석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기습번트를 시도했다. 투수 땅볼에 그친 그의 번트 타구를 보면서, 또 어떡하든 1루에 살아나가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뛰던 최희섭을 보면서 '오죽하면 저럴까'라는 생각을 했다. 안타까웠다.

1m96㎝의 거구(최희섭은 컵스 타자들 가운데 최장신이었다)에 어울리는 호쾌한 스윙이 최희섭의 몫이다. 번트로 무사 1루의 찬스를 만들기보다는 단 한방에 1점을 얻어내는 홈런 스윙을 하는 것이 최희섭에게 어울리는 플레이다.

그러나 최희섭은 그 상황에서 번트를 시도했다. 자신의 몫을 추구하기보다는 누구에겐가 보여주기 위한 플레이를 한 것이다. 누굴까. 더스티 베이커 감독이었을 것이다. 최희섭은 베이커 감독에게 자신이 팀 승리를 위해 개인플레이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을 것이다. 1루수 경쟁자였던 에릭 캐로스의 안정된 활약과 랜덜 사이먼의 가세로 좁아진 자신의 입지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떡하든 25명 로스터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베이커 감독의 눈에 들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지구 1위를 차지하기 위해 개인성적을 추구하는 선수는 '역적'으로 몰리는 컵스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최희섭의 번트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희섭은 이 번트 하나가 상징하듯 올 시즌 '쫓기면서' 야구를 했다. 갖가지 부담 탓에 자기 스윙을 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쳤다. '보스'는 승리를 추구했고 최희섭에게 성장의 기회를 마련해줄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젠 달라졌다. 플로리다는 기회의 땅이다. 최희섭은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긴 한숨을 내쉰 뒤 "이젠 정말 마음껏 내 스윙을 하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되기를 바란다. 말린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최희섭이 번트를 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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