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문혁때도 수난면한 공명사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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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6월22일 오후3시30분. 비행기는 사천성 성도를 향하고있다. 서안을 떠나자마자 곧 새파란 험한 산맥이 장성처럼 동서로 뻗어 있다. 진령산맥임이 분명했다. 이 산맥을 지나니 곧 한줄기 칼날같은 산봉우리가 줄을 잇는다. 아마 저기가 용문관 아니면 검문산인가 보다. 모두 역사에 나오는 산들이다. 원래 북으로부터 파촉(사천성)으로 들어가자면 하늘 올라가기보다도 더힘들다(촉도지난난어상천)는 이곳을 지나는 길 밖에 없다. 산맥을 지나니 별천지가 눈앞에 전개된다. 모든 것이 새파란 사천의 분지가 나타난다. 성도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 무렵.
비행장으로부터 시내로 들어가는 길가의 광경은 산도 논도 파랗고 강도 파랗다. 제갈공명이 「옥야천리」라고 표현한 이 지역은 중국 전체에 있어서도 벼농사가 가장 잘되는 곳이다. 아열대의 기후를 가진 이 분지가 얼마나 비옥한 곳인가는 눈으로 볼 수 있다.
사천성은 중국 서남방의 중심이며 「사천」이라는 이름은 네개의 대강(민강·장강·타강·가능강)이 그 젖줄이라는데 연유한다. 이곳은 중국 최대 농업지구의 하나며 동시에 중국유수의 공업지대이기도 하다. 각종 중공업, 기술 집약적공업이 여기에 있고 우주항공산업, 전력·석유 화학공업등의 중심지다.
이 성의 인구는 자그마치 1억8백만, 중국에서도 가장 인구가 조밀한 지방중의 하나다.
지하자원도 대단히 풍부하다.
중국을 사람의 몸에 비한다면 사천성은 어디에 해당할까. 내가 보기에는 북경은 머리, 상해가 심장, 임표가난 호북과 모택동이 난 호남, 그리고 양자강 하류 일대가배(복부)라면 사천은 마치 배꼽밑의 단전과 같은 곳. 단전은 사람의 담력과 「기」의 저력이 오여 있는 곳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천은 중국의 단전이다. 이 고장은 역사상 「기」를 공급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중국. 5천년사상 최대의 멋쟁이 소동파. 뱃심좋게 할말을 하다가 겨우 사형을 면하고도 태연히 해남도에 귀양가고 다시 돌아와 높은 버슬을 했다. 자기를 귀향보낸 왕안석을 찾아가서 「선생」이라고 하면서 시를 짓던 동파. 인생의 멋을 있는대로 품긴 이 멋쟁이가 여기 미산태생이다. 최근에 와서도 사천성은 「기」있는 거물을 많이 배출했다. 등소평·조자양·양상곤, 그리고 한세대 전에는 주덕·진의·유백승·하룡·곽말야, 그리고 화가 장대천. 사천은 또 여류로도 일급인물을 배출했다. 즉천무후·양귀비, 그리고 중국 역대 최고의 여류시인 설도.
사천은 비단 인물을 배출했을뿐 아니라, 많은 「기」있는 인물을 받아들여 길렀다. 유비·제갈공명, 그리고 촉한 대부분의 인물은 다른 지방 출신인데 모두 여기서 유명해졌다. 제갈공명은 이곳이 마음에 들어 뽕나무 8백그루와 박전 15경을 장만해 퇴관후 여기 살고자 했다. 27년에 걸친 풍진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그의 심신은 어딘가 안온한 곳을 바랐을 것이다. 당현종때 일어난 안녹산의 난은 중국 최대의 시인 두보를 이곳에 이주시켰다.
두보와 쌍벽을 이룬 이백도 여기에서 자랐다. 내가 중학교 2학년때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일본 책에서 이백은 돌궐(돌궐-터키족)의 자손이라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나의 선친에게 그 말씀을 드렸더니, 선친은 그후 여러번 당시 한문하시는 어른들과 그 얘기를 나누었지만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이백의 생과 사에 관해서는 아무도 잘 모르지만, 이번 여행중에 중경에서 산 책(서남사범대학출판사 『삼협시회』)에 의하면 이백은 지금의 소련 키르기스에서 출생했으며 그 당시 그곳은 당나라의 안서도호부의 영토였다고 한다. 이 책에 의하면 이백은 5세때에 부친을 따라 지금의 사천성 강유현에 이사를 왔다고 한다. 그에게는 중앙아시아 민족의 피가 섞여 있음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와 정박사를 안내하는 사씨라는 35세가량의 청년은 아주 영어가 능통하다.
천안문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2년전에는 자유화의 물결이 너무 심해서 나라에 질서가 없었으므로 도저히 그런 정세가 오래 허용될 수는 없었다는 의견을 말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인상은 중국국민의 대다수는 적어도 곁으로는 현재의 상태에 별불만이 없는듯 했다. 모든 사람이 우선 먹고 살기에 바쁘고 돈벌이하는데 여념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유화·민주화의 요구에 대해서는 그리 민감한 것 같기 않았다. 물론 나의 관찰은 피상적일 수도 있다. 이들의 표정은 비교적 밝은 듯이 보였으나 그 밑에는 많은 불만이 깔려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소련의 사태가 지금처럼 된 이후에는 그들의 표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련사태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나라는 소련보다 낫다고 보고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에 대해 어느정도의 농담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그들은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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