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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대국 각축장 된 중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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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도 메소포타미아와 인근 지역은 외세에 쉽사리 통치권을 내주었다. 석유가 발견되고 세계 에너지의 중심이 되자 서구 석유 메이저들이 이곳의 개발권을 장악했다. 원유 매장량 세계 2위의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의 에너지 자본은 50년 이상 장기 계약으로 상당수 유전의 권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중동에서 미국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대부분의 아랍 독재자는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정권 유지에 급급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란까지 넘보는 과욕을 보이면서 되레 역효과를 내고 있다. 이집트 알아흐람 전략연구소의 무하마드 술탄 박사는 "미국이 이란을 건드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실수"라고 지적한다. 이란은 이스라엘 다음 가는 중동의 군사대국이다. 10여 년 혹독한 경제제재로 허약해진 이라크와 달리 미국이 만만하게 다룰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여기에 시아파 종주국으로서의 영향력도 있어 정치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다. 시아파는 이란 이웃국가인 이라크에서 정권을 차지한 데다 서쪽으로는 이라크.시리아.레바논, 남쪽으로는 쿠웨이트.오만.예멘의 시아파 주민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술탄 박사는 "이들 국가는 미국의 이란 공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역효과는 중국은 물론 러시아까지 중동 개입에 나선 데서도 나타난다. 중국과 러시아는 지난해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 주도의 '대(對)이란 경제.외교 제재 결의'에 마지못해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협조는 거기까지일 뿐 이라크와 같은 사태가 이란에서도 발생하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을 전망이다.

이라크 전쟁 이후 중국은 중동.아프리카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에너지 수급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2003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 연안국 유전에 수백억 달러를 투자했다. 두 달 전에는 이란과 160억 달러 규모의 북파르스 가스전 개발에도 합의했다.

핵시설과 에너지 분야에 이미 20여 년 전 이란에 거점을 마련한 러시아도 최근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번 주 블라디미르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동의 친미 3개국(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요르단)을 방문한 것은 미국의 대이란 압박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신호다.

미국이 이라크에 발목을 잡히고 이란과 다투면서 인심을 잃자 러시아가 발 빠르게 중동과 손을 잡으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과 카타르의 가스전을 놓고 에너지 협력을 강화하는 모습이지만, 그 이면에는 무기시장 개척 의지도 엿보인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와 미.소 냉전시대를 거친 중동은 다시 미.러.중 3강의 세력 각축장으로 변하고 있다. 중동 국가들은 이 같은 힘의 균형을 내심 반기는 분위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이 푸틴을 크게 환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석유라는 자산이 있지만 자신을 지킬 힘은 부족한 중동 국가들은 단극체제보다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다극체제를 환영할 수밖에 없다. 역사학자들은 서쪽의 비잔틴 제국과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226 ~ 651)이 패권을 놓고 경합을 벌인 3 ~ 7세기 사이 수백 년간 메소포타미아 주민은 평화를 구가했다고 전하고 있다.

서정민 카이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