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의 비문화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7)|과당경쟁|자존심 세우기 TV 무한 소모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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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문화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경쟁이란 미명아래 물불·안 가리고 싸우는 광경은 마주 달리는 기관차를 보는 것만큼이나 아찔하다.
결국 경쟁은 허울좋은 명분에 그쳐버리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싸움 끝에 남는 것은 번번이 알량한 자존심뿐이다.
국내 TV방송의 양대 산맥인 KBS·MBC의 맹목적이고도 무분별한 경쟁상은 삼척동자라도 알만큼은 아는 사실이다.
내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TV 중계문제를 놓고 양 방송사가 벌인 상대편 딴죽걸기의 내막도 알고 보면 뒤끝이 개운치 않다.
일찌감치 개별중계 방식으로 결정은 됐지만 당초 교섭과정에서 인력절감을 위해 합동중계로 하자는 게 MBC측의 주장이었고, 반면 편성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각 사의 개성을 살리려면 개별중계를 해야 한다고 KBS측은 강변했다.
둘 다 이유는 그럴 듯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KBS가 MBC보다 채널 1개를 더 갖고 있다는데서 빚어진 줄다리기였다.
이렇듯 자기편에 더 많은 시청자를 끌어 모으기 위한 상호견제 작전을 짜내느라 골몰하면서도 겉으로는 늘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양 사의 TV경쟁은 심하게 말해 이전투구 양상이다.
얼마 전 양 사가 똑같이 엄청난 인원·예산을 쏟아 붓는 과잉경쟁으로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던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현지보도」가 이런 경우다.
교양·오락물들은 지나치다못해 짜증스러울 정도로 보는 이들이 이쪽저쪽으로 채널 돌리기에 바쁘다.
어느 한쪽이 쇼 프로그램으로 재미를 봤다 싶으면 어느 틈엔가 상대방 쇼프로가 같은 시간대에 어김없이 맞물려 있음을 발견한다.
KBS가 드라마의 질을 높인다며 오랜 공백 끝에 『TV문예극장』을 새로 들이밀자 MBC도 부랴부랴 『베스트극장』으로 이를 맞받아쳤다.
한술 더 떠 김빼기 작전이란 것도 있다.
MBC-TV가 큰마음 먹고 만든 대형 특집 다큐멘터리 『해양실크로드』가 방송될 때쯤 느닷없이 KBS에서 일본 NHK-TV가 제작한 『바다의 실크로드』를 입수, 미리 방송하는 바람에 MBC제작진이 한동안 방송 시기를 놓친 채 분통을 삭이지 못한 적도 있다.
발레·무용단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의 한 단체가 외국의 유명한 무용단을 초청하려 하면 너나없이 함께 달려들어 경쟁을 벌이는 통에 종내는 공연료만 국제시세보다 몇 곱절씩 올려놓는 결과를 빚곤 한다.
그래놓고도 여론의 비난을 받을까봐 외화낭비나 다름없는 초청조건은 늘 대외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비생산적 경쟁 때문에 해외공연 단체 사이에선 「한국은 봉」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는 소문이다.
과당경쟁은 영화계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홍콩영화의 수입 흥행이 그 좋은 예다.
89년에 수입된 『지존무상』이 국내에서 크게 히트하자 최근엔 1편 값인 23만 달러를 주고도 족히 손에 넣을 수 있는 2∼3편을 70만 달러 이상을 주고 수입해 왔다는 뒷얘기가 들린다.
이 영화들 말고도 홍콩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한국시장을 노려 폭력물을 제작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우삼 감독, 주윤발 주연의 『첩혈쌍웅』은 시나리오도 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업자끼리 치고 받는 과당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1백70만 달러까지 값을 올리는 웃지못할 일도 생겨나고 있다. 이른바 입도선매다.
근래 국내에서 개봉된 미국영화 『미저리』는 국내영화사인 HS필름의 섣부른 경합으로 40만 달러면 충분할 수입가격이 60만 달러로 껑충 뛰기도 했다.
출판사에서 회자되는 「새우젓장수」란 우화가 있다. 한 새우젓장수가 「새우젓 사려!」하고 외치면 뒤따라 「나도」해서 공으로 먹는다는 사람의 얘기다. 한 업자가 어떤 책으로 재미를 보면 금세 같은 책을 출간해 경쟁 끝에 시장판도를 뒤집어버리는 출판업자가 있어 별명으로 이런 우화가 생겨났다.
시드니 셸던의 소설이 인기를 끌자 10여 개 출판사에서 같은 작품을 제목만 바꿔 수 십 종씩 출간, 판매경쟁을 벌이는 행태가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한다.
서울대 강현두 교수(54·신문학과)는 『명색이 문학·예술을 다룬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있음은 큰 문제』라며 『현재에 연연하지 말고 긴 안목을 가지는, 특히 윗사람들이 그런 자세로 행동해 귀감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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