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53. 스크린 테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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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영화 '선셋 블러바드(황혼거리)'에서의 윌리엄 홀든(右) 모습.

흰색 리무진이 우리가 머물고 있던 호텔 앞에 도착했다. 1959년도 미스 유니버스의 영예는 미스 일본에게 빼앗겼지만 나와 미스 코리아 오현주는 우리를 데리러 할리우드에서 온 리무진을 보면서 또 다른 희망에 가슴이 부풀었다. 파라마운트 영화사에서 보낸 리무진은 우리 일행을 베벌리힐스의 힐튼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다. 호텔 스위트룸에 짐을 푼 후 우리는 파라마운트사에서 보내 준 스케줄을 점검했다. 다음날 아침 7시 호텔에서 출발이었다.

이튿날 아침 7시 정각, 흰색 리무진을 타고 우리 일행은 파라마운트사로 향했다. 이어 사무실에서 간단한 브리핑을 받았다. 영화 '수지 웡의 세계'에서 주인공 수지는 귀여운 외모의 중국인 창녀였으며, 상대역은 영화 '모정'의 남자 주인공이었던 윌리엄 홀든이었다. 스크린 테스트가 곧바로 시작됐다. 한 중년 여성이 대본을 읽어 주더니, 현주에게 그대로 따라해 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그녀가 빈 방에서 이젤을 앞에 두고 넋을 잃고 앉아 있다. 갑자기 나이프로 캔버스를 힘껏 내려 긋는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대충 이런 설정이었다.

"고!" 하는 외침과 함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레이션이 흐르고 현주는 자연스럽게 연기를 시작했다.

촬영 조수가 눈약을 건네주려 했으나 현주는 필요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잠시 후 그의 큰 눈에서 방울 같은 눈물이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컷!"이라는 소리가 들린 뒤 몇 초 동안 스튜디오가 조용하다가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브라보'를 외쳤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나는 현주에게 그렇게 훌륭한 연기 재능이 있었는지 정말 몰랐었다. 촬영이 마친 우리는 영화사 구내식당으로 안내됐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인을 받으려고 현주 앞에 줄을 섰다. 할리우드에서도 미스 코리아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외모가 눈에 익은 잘 생긴 남자 한 명이 있었다. 그가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게 아닌가. 기분이 묘해졌다.

"오, 미스 코리아, 내게도 사인을 해줘요. 내 집사람이 미스코리아 팬이거든"하면서 줄을 섰다. 그 미남자는 명화 '로마의 휴일'의 그레고리 펙이었다.

파라마운트사에서는 스크린 테스트에 합격했으니 계약을 하자고 연락을 해왔다. 나는 현주 아버님과 상의해 결정하겠다고 답을 보내고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에 도착한 우리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연극 '수지 웡의 세계'를 관람했다. 뉴욕에서 연극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수지 역할을 맡은 여배우 프란시스 뉴엔은 현주와 쌍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꼭 닮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연극을 함께 본 현주의 식구들(특히 오빠가)이 영화 출연을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다. 수지 웡의 역할이 창녀라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었다.

안타까웠지만 나는 이에 대해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다. 현주와 그의 가족들이 결정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얼마 뒤 영화 '수지 웡의 세계'는 중국계 영국 배우인 낸시 콴이 주연을 맡아 영화화 되었다.

노라 ·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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