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 길 떠난 사람들 얘기 … 정치색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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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올 베를린 영화제(8일~18일)는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함께 국내 관객에게는 낯선 한국영화 한 편을 공식경쟁부문에 초청했다. 한국.몽골.프랑스의 합작으로 몽골에서 촬영한'히야쯔가르'다.

사막으로 변해가는 허허벌판에서 묵묵히 나무를 심는 남자(바트 얼지)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탈북한 뒤 몽골에 이른 젊은 엄마(서정)가 주인공. 서로의 말을 모르는 채 소통과 배려, 그리고 상처와 좌절을 겪는 모습을 애잔하고 강렬하게 표현했다.

감독은 재중동포 3세인 장률(45). 마흔 가까운 나이에 영화를 시작해 그 사이 국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아왔다. 직전 작품인 '망종'은 김치 행상을 하면서 어린 아들과 강인하게 살아가는 젊은 조선족 엄마의 이야기다. 극장가에서는 단관 개봉에 그쳤지만, 예사롭지 않은 만듦새는 단연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번'히야쯔가르'는 감독에 의기투합한 국내 제작사가 투자에 나서 만들어졌다. 부동산개발회사 21세기컨설팅(대표 양화석)이 만든 신생영화사 G21M이 그곳. 여기에 영화진흥위원회와 프랑스의 국립영화센터(CNC)가 힘을 보탰다. 충무로의 한국영화가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한민족의 이야기로, 한국 영화의 경계를 넓혀온 장률 감독을 서울에서 만났다. 8일 개막식에 맞춰 베를린으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영화제 관계기사 25면>

-'히야쯔가르'의 젊은 엄마(최순희)와 어린 아들(창호) 이름이 '망종'과 똑같다. 각각 탈북자.조선족이라는 점은 다르지만, 아버지를 잃은 가족이라는 점 역시 닮았는데.

"새로 이름짓기가 고달파서 같은 이름을 썼다.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혼자 생활하는 얘기를 자꾸 하게 되는 건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 것 같다. 내가 5, 6살 무렵 어머니가 아이들만 데리고 시골에 가서 몇 년을 산 적이 있다. 문화대혁명으로 아버지가 감옥에 간 집들은 그때 그랬었다. 전기도 안 들어오고, 조선족이 거의 없는 마을이었다. 어머니의 고생이 대단했다."

-탈북자 이야기를 하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내 고향이 옌벤(延邊) 아닌가. 지금도 명절이면 가는데, 가슴 아픈 사연을 많이 듣고 본다. 내 영화는 정치영화가 아니다. 이북의 체제가 어떤지, 이북이 맞는지 미국이 맞는지 정치는 잘 모르고 관심이 없다. 이 영화에서도 이야기가 시작될 때 그들은 이미 탈북한 상태다. 다만 길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몽골에서는 초원의 사막화가 진행 중인데, 탈북자는 마음의 사막화를 겪는다. '망종'과 다른 스타일로 찍은 것도 그런 이유다. 망명한 사람들, 숨어다니는 사람들의 호흡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 그 감정을 그리려고 핸드헬드(handheld)를 기본으로 찍었다."

-'망종'도 그렇지만 '히야쯔가르'역시 경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다. 재중동포라는 정체성과도 관련 있을 듯 한데.

"히야쯔가르는 몽골어로 세계, 경계할 때의 '계'(界)라는 뜻이다. 국경만 아니라 사람들 마음에 경계가 있다. 할아버지 고향인데도, 한국에 올 때마다 힘들다. 비자도 매번 다시 낸다. 베를린은 이번에 처음 간다. 공항에 내리면 제일 먼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자리에 가보고 싶다. 사람들 마음 속의 장벽은 얼마나 무너졌는지, 새로운 장벽은 어느 정도인지. 혼자 길 떠나는 어머니의 모습이라는, 내 감성에서 출발한 영화지만 결국 '계'에 대한 이야기다. 계를 없애면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통한다. 영화란 결국 마음에 대한 것이니까."

-건조하고 모래바람이 심한 곳이라 몽골 현지촬영이 퍽 힘들었겠다.

"다시는 몽골에서 영화를 안 해야지, 싶었다. 두 달 동안 딱 한번 목욕을 했다. 바람이 많아 냄새는 나지 않았다(웃음). 마음이 정리되고 나니 한 편만 하기는 아까운 곳이란 생각이 든다. 몽골 사람들의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이 감동적이었다. 남자주연인 바트 얼지는 몽골에서 안성기같은 국민배우이자 감독이다."

-베를린 영화제에 경쟁작으로 초청된 소감은.

"영화를 상영한다는 자체가 기쁘다. 사실 고향에 가면, 영화를 한다니까 '대종상'시상식에 가봤느냐고 묻고들 한다. 이 영화가 외국에서 돈을 버는 것보다 한국에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관객이 봤으면 좋겠다. 상을 못 타도, 대종상에 후보만 되더라도 행복할 것 같다. 이 영화를 만들도록 나서준 제작사의 용기가 고마울 뿐이다."

-영화 감독이 되기 전에 옌볜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했고,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래된 얘기다. 내가 하는 말로, 문학과 이혼하고 영화와 결혼했다. 새 여자를 만났는데, 옛날 여자 얘기를 꺼내면 곤란하지."

글=이후남 기자<hoonam@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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