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개월 만에 깨진 '100년 정당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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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6일 열린우리당 개헌특위 위원과의 오찬 도중 눈을 감은 채 김근태 당의장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사진=안성식 기자]


6일 집단탈당을 대하는 열린우리당의 반응은 묘하다. 한편에선 울분과 우울함이, 다른 한편에선 안도와 기대가 섞여 나온다.

김근태 의장은 이날 노무현 대통령과의 오찬에서 "심정이 굉장히 울적하고 국민에게 죄송하다"며 "오늘을 계기로 2당으로 무너졌다. 가슴에 상처가 오고 있다"고 말했다.

문희상 전 의장은 탈당 직후 열린 당 지도부 회의에서 "(탈당파의) 애절한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그런 결심은 통합이 아닌 분열을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상호 대변인은 "탈당 회견을 보다가 자꾸 목이 잠겼다"며 "이들이 포기한 건 기득권이 아니라 당적일 뿐"이라고 말했다.

당 사수파인 이화영 의원은 "'김한길당' 같은데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 의원은 "탈당 규모가 20여 명에서 그친 게 다행"이라며 "타격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휘청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열린우리당의 대통합신당 논의가 자극을 받아 더 조화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탈당 규모가 40여 명 선을 넘으면 오히려 '본진'이 해체될 우려가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창당에서 분당까지=열린우리당은 2004년 4월 총선에서 과반(152석)의석을 얻어 1당이 된 지 33개월 만에 2당으로 밀려났다.

2002년 12월 대선 승리 후 당시 민주당 천정배.신기남.정동영 의원 등 '신주류' 측은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신당 창당에 나섰다. 2003년 4월 재.보선에서의 완패는 신당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그해 9월 당무회의 폭력사태는 신당파의 집단탈당(20일)을 불렀다. 9일 뒤엔 노 대통령이 탈당, 신당파에 힘을 실었다. 두 달 뒤인 11월 11일 의석 47명(민주당 탈당파 40명, 한나라당 탈당파 5명, 개혁국민정당 2명)의 열린우리당이 공식 출범했다.

2004년 2월엔 노 대통령의 탄핵을 막지 못하는 소수여당의 비애도 겪었다. 하지만 이는 '전화위복'으로 작용, 두 달 뒤 총선에서 152석을 차지하며 원내 과반 여당이 된다. 건국 이래 최초의 의회 권력 교체란 기록도 세웠다.

하지만 17대 국회 시작부터 당은 삐걱댔다. '실용 대 개혁'이란 정체성 논쟁이 붙었고, 노 대통령과 당이 자주 충돌하면서 당.청 갈등까지 생겨났다.

결국 17대 총선 직후 50%까지 치솟았던 지지율은 2년 만에 10%대로 급락했다. 그 사이 치러진 모든 재.보궐 선거에서 당은 '40대0'의 참패를 기록했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에선 서울을 비롯한 16개 광역 시.도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글=고정애.이가영.정강현 기자 <ockham@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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