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량 소화해낼 시설이 과제|경매제 한달 서울 가락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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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농산물의 불합리한 유통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7월1일부터 전국적으로 실시한 「농산물의 상장경매 의무화 조치」가 중매인의 반발과 일부 농민들의 시위 등 부작용에도 불구, 시행 한달을 맞으면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전국 최대의 농수산물 도매시장인 서울 가락동시장의 경우 새로 상장된 채소류의 가격이 한때 폭락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품목에서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어 판매 농민들이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당국의 사전 준비부족으로 아직도 농민·상인들에 대한 홍보가 제대로 안돼 있는데다 경매장시설도 절대적으로 부족, 앞으로 김장철 등 한꺼번에 엄청난 물량이 쏟아질 경우 경매 지연으로 인한 가격 폭락사태를 빚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농민들은 앞으로 철저한 상품 경쟁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는 점을 인식, 중간상에게 「적당히」 팔아버리던 과거의 방식에서 하루 빨리 탈피해 상품의 규격화 및 포장· 품질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위탁판매 방식 =지금까지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에 반입되는 농산물의 하루물량 5천여t 가운데 포장 및 규격화가 손쉬운 과일종류 1천t 정도만 경매 방식으로 판매되고 나머지 80%인 4천여t은 중매인에 의해 위탁판매 돼왔다.
즉 중매인들이 농촌을 돌며 수확을 앞둔 농산물을 미리 「밭떼기」로 매입하거나 선도금을 주고 계약한 뒤 수확과 함께 농수산물 도매시장으로 가져와 임의의 가격으로 「중판」「앞잡이」등으로 불리는 대형 소매상에게 넘기고 다시 여러 단계의 소매상들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이다.
농민들로선 애써 지은 농사를 그저 「본전치기」 정도로 넘겨버리고 대신 중간상이 배를 불려온 셈. 중매인들은 두세차례 정도 적당한 가격을 지불, 농민들의 판매경로를 자신들에게 고정되도록 한 다음부터는 엄청나게 값을 깎아버리는 「칼질」을 하기가 일쑤여서 농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중매인들에게 헐값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경매제=준비가 미흡한 상태임에도 불구, 정부가 경매제를 서둘러 강행한 것은 앞서와 같은 문제점을 해소하고 경쟁을 통해 상품의 고급화·규격화를 유도하지 않고서는 우루과이라운드에 따른 농산물 수입 개방체제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에 따라 7월1일부터 사과·배 등 10개 과실류, 수박 참외·토마토 등 5개 과채류, 오이·호박·당근 등 6개 포장 채소류 등 21개 품목의 상장경매가 의무화된데 이어 매년 1월부터는 무·배추를 제외한 나머지 29개 농산물, 93년 1월부터는 무·배추까지도 경매가 의무화된다.
경매제 판매경로를 보면 농민이 수확한 농산물을 직접 도매시장에 가져와 시장 내 법인회사(지정도매인)에 상장 의뢰하거나 송장을 첨부해 화물로 보내면 법인회사는 일정수수료만 받고 이를 경매에 부쳐 중매인들에게 판매하고 중매인들은 소매상들에게 넘겨 소비자에게 전달되도록 한다.
중매인들은 위탁판매제에서는 「한탕」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경매가에 일정한 이윤을 붙여 소매상들에게 넘기는 역할밖에 못하게 된 셈이며 7월2일부터 15일까지 가락동시장의 중매인들이 경매에 집단으로 응하지 않은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불만 때문.
◇문제점=서울시는 경매제 실시에 앞서 가락동시장의 기존경매장 8천8백95평 외에 5개 법인 회사별로 2백평씩 1천평을 확보토록 했으나 이 정도 규모로는 현행 21개 품목을 경매하기에는 턱없이 비좁은 실정이다.
한국청과 오사문 업무과장(39) 은 『요즘은 대체로 반입물량이 적어 경매가 어느 정도 유지되지만 물량이 늘어날 때는 ▲경매가 지연돼 야채 등의 신선도가 떨어져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며 서울시의 조속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또 경매 물량은 4배 이상 늘었으나 경매사는 전혀 늘지 않았으며 상당수의 중매인들도 지금까지 위탁판매에 치중해온 탓에 손가락으로 가격을 표시하는 수지법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경매 지연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와 함께 경매를 위해서는 농산물의 규격화·포장화가 필수조건이나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 농촌현실에서 농민들이 이에 얼마나 따라줄 수 있는 가도 숙제로 남아 있다. <이효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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