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46. 최초의 패션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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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국내 최초의 패션쇼가 끝난 뒤 꽃다발을 받고 있다. 오른쪽 의자에 앉은 외국 여성은 패션쇼에 초대됐던 미국인 모델.

1956년 11월 29일 오후 2시. 드디어 시작 시간이다. 생각보다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티켓도 없이 온 사람들이 입장시켜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패션쇼 현장에서 매표를 금하기로 했고, 시작 시간이 지나자 출입구를 닫도록 지시했다. 패션쇼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패션쇼였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감이 쇼 장을 꽉 채우고 있었던 것만큼은 오늘날의 패션쇼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아노의 선율이 경쾌하게 울려 퍼지자 객석의 관객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쇼 장으로 나가 미리 마련된 좌석에 자리 잡았다. 사회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왔다.

피아노 연주자는 당시 최고 인기 연주자이자, 후에 '마포종점''초우' 등의 명곡을 작곡했던 작곡가 박춘석씨였다. 1부 사회는 문단에서 멋쟁이로 알려졌으며, 후에 경향신문사 부국장까지 지냈던 고 이진섭씨가 맡아 줬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이 역사적인 패션쇼 사회를 맡게 된 이진섭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여사는 일찍이 미국에서 패션 공부를 하고 돌아와 서울에서 부티크를 열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이번에는 유럽을 돌며 파리에서 패션 연수를 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를 열게 되었습니다. 노라노 여사가 강조하려 하는 것은 오늘 선보이는 의상들의 소재가 100% 국산이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모직 원단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노 여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 옷감으로 만든 의상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작품은 원피스 코트 앙상블."

이진섭씨의 소개말로 나의 첫 번째 패션쇼이자 '대한민국의 첫 번째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순간 나는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참느라 혼났다. 한 벌 한 벌 모델들이 옷을 입고 나와 손님들 앞을 걸어가며 앞뒤로 포즈를 취했다. 생각보다 모델들은 침착했고 잘하고 있었다.

1부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2부가 시작됐다. 1부의 경쾌한 음악하고는 달리 바이올린 선율이 곁들여진 관능적이고 로맨틱한 음악이 흘러 나왔다. 애달픈 바이올린의 선율이 속에 아름다운 여인들의 스쳐가는 드레스를 보며 관객들은 난생 처음 보는 이벤트에 흥분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서로 그 해 최고 여배우 상을 수상한 조미령씨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서히 등장하자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2부의 사회는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이봉래씨가 맡아 주었다. 무대 위에 섰던 모델들이 다시 한 사람 한 사람 박수를 받으면서 조미령씨 옆으로 늘어섰다.

"오늘의 주인공! 노라노!"하고 사회자가 나를 호명해 그들 옆으로 나가 인사했다.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답을 했고 무수한 꽃다발이 내 팔에 안겨졌다. 이렇게 패션쇼의 역사가 우리나라에서 시작 되었다.

노라 ·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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