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연대」측 교수운동원이 본 광역선거/이각범 서울대·사회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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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실감한「단기차익주의」의 벽/ 청년층 이기주의에 앞날 걱정
이번의 광역의회선거는 여러측면에서 우리사회의 현 위치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밝혀주고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골목길의 현장에서 우리사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한사람의 사회학자로서 귀중한 체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언론을 비롯한 사회여론주도층에서는 선거결과를 여당이 압승하고,기존의 제도권 야당을 포함한 야권이 참패했다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으나 지방자치의 순수한 입장에서 본다면 결과의 심각성은 다른 곳에서 찾아진다. 그것은 「졸부들의 지방의회로의 행진」을 저지하지 못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기존정당들은 각 지방의 재력있는 졸부나,중앙당에 공천을 달라고 돈보따리를 싸들고 오는 사람에게 낙점을 내렸으며,비교적 양식있는 인사들로 공천해 지방의회를 지방의회답게 꾸미려고 한 노력은 극히 일부지구당에 국한되었었다.
지방의회가 정치판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은 바로 정당이 내고자 했던 후보의 면면을 보고 한 양식있는 인사들의 걱정이었다.
토지에 대한 투기가 극심하고,대통령 스스로 이를 막겠다고 몇번이나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졸부들의 「투기=과소비행진」이 그쳐지지 않은 마당에 바로 그 장본인들이 자리잡은 지방의회가 앞으로 환경·교통·교육·소비자문제등 시민생활과 직결된 영역에서 얼마나 시민생활의 편익과 우리사회의 미래를 위한 방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혹시 지방자치는 우리나라의 실정에 비추어볼 때 아직 너무나 이르다는 반성을 우리 모두가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시민연대회의가 발족해 구태여 참신한 인사를 설득하고 권유해 출마시킨 이유도 바로 잘못된 정치관행으로 인해 시민생활과 이 나라의 모습이 왜곡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선거의 결과를 놓고 볼때 정치적 기득권층과 경제적 기득권층이 두텁게 결속된 일종의 벨트가 우리사회에 존재하고 있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여야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 벨트에 터를 갖고 있으며,「자본론」과 「주체사상」의 논리에 젖은 운동권은 이 벨트를 더욱 공고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역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선거의 과정에서 여당측이 은밀하게 주민조직을 파고 드는 사랑방 좌담회와 이들 좌담회에서 만들어지는 흑색선전에 대항해 무소속의 후보가 할 수 있는 대응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선거관리위원횡 이와 같은 사실을 몇번 신고했으나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무런 제동을 걸지 않았다. 공선협에서 회원을 동원해 흑색선전내용을 고발하는 유인물을 돌리는 것이 고작이었으나,그나마 선거법 위반이라고해 공선협회원중 몇명이 경찰에 연행된 사례가 있기까지 했다.
그러는 사이에 주위의 권유에 못이겨 출마했던 전형적 선비형의 어느 교수는 골목길 아낙네들의 혀끝에서 『김귀정양의 장례식에 돈을 대준 운동권 교수』로 둔갑해 있었다. 정치기득권층의 암수와 운동권이 만들어낸 정치혐오감이 온건개혁세력을 협공하는 전형이 이루어진 것이다.
선거의 과정과 결과에 「청년층의 배반」이 합세했다. 운동원으로 등록하고난 뒤 아파트 길 혹은 지하철 입구에서 아침 저녁으로 후보자 소개전단을 나눠주면 세대에 따라 전단을 받는 태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외제 스티커를 차에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 20대와 심각한 표정으로 양미간을 찡그리며 지하철 역을 향하는 30대 초반은 시건방짐이 가득찬 표정으로 그냥 지나쳐 간다. 85년 당시 선거혁명을 일으킨 장본인들이었으며,87년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바로 20대와 3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나와 직접 관련없는 일은 상관않겠다는 그들의 태도는 충격이었다.
『매년 해가 갈수록 신입생은 점점 더 개인주의적이 됨을 느낍니다.』 어느 대학원생의 말이 생각나는 장면들이 매일 반복되고 있었다. 선거운동과정에서의 불길한 예감은 젊은층의 대량기권으로 현실화되었다.
「젊은층­정치불신을 기권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아부성이 가미되어 미화된 표현이다.
선거가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우리사회의 암담한 미래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운동의 현장에서,그리고 투표장에서 본 청년층의 현실은 점점 이기주의화해 가는 이 사회의 표현이다.
책임없이 자기요구만 외치는 매일의 관행과 거리에서 조금 양보하는 것은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도 막상 교통문제와 도시계획을 다루는 공공의 일은 내일이 아니니까 무관심하겠다는 태도는 우리사회의 단기차익주의가 젊은층의 행태에서 확대재생산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의 광역선거 한번이 문제가 아니라 기성세대가 해온 우리사회의 가정과 학교교육이 문제이며 이들 젊은이들이 주역이 되어 꾸려갈 미래의 우리사회가 걱정인 것이다.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하는 과제가 설정되어진다. 우리사회의 현실을 알고 선거의 현실을 보고나니까 비록 낙선했지만 시민연대의 후보들이 얻은 표는 엄청난 것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표들은 돈과 조직에 물들지 않은 지역감정과 기득권 수호에 급급하지 않았던,그리고 이기주의에 의해 포기되지도 않았던 깨끗한 한표들이었다. 내가 운동원으로 등록했던 후보도 차점으로 낙선했으나 3∼4위를 한 정당후보들에 비해 월등하게 압도적 표를 얻었는데,이 모든 표들은 유권자들이 홍보물에 적힌 「인물」하나만 보고 선택한 것이었다.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어려운 결단을 내렸던 후보들과 그들을 위해 운동비용까지 자담하면서 도왔던 또다른 청년층이 바로 새로운 출발의 시발점이다. 이제부터 시민생활의 제분야에서 새로운 대안들이 구체적으로 마련된다면 희망의 유권자들은 이기주의의 재생산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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