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5)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4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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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술자리의 총격전>
『전쟁기간에는 오직 일본군 쳐부수는 데 용감하라. 결혼은 승리 후에 하자.』중국군 장병들에게는 그간 「결혼금지령」이 내려져 있었는데 이제 승리와 함께 금지령이 해제된 것이다.
오늘은 193사단 수송연대장 조린 중교(중령)의 결혼식 날.
전승 제1호 결혼이었다. 신부 엄순친양은 중경에 있는 전시연합대학에 다니다가 승리의 소식과 함께 7백km을 단숨에 달려온 맹렬여성.
그런데 오늘 결혼식에는 수용소에 있는 일본장교들이 초대되어 말썽을 일으켰다. 그것은 마치 일본군 투항식이 있기 전 상해 위수사령관으로 부임한 탕은백 장군이 개선시가행진을 할 때 패전 일본군 2개 분대를 차출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썽이었다.
중국인들은 자기가 제일이라는 중화사상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생일이나 결혼식에 외국인이 참석하는 것을 경사로 여긴다.
11월 24일.
필자는 김영주·중국장교 셋과 함께 일본군인의 저녁식사 초대에 참석했다.
독자 중에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집단 포로생활을 하는 일본군이 어떻게 손님을 청할 수 있을까 의아해할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무장해제를 당한 뒤였지만 중국군에 기술교육을 하기 위해 수명의 특과장교와 기술병만으로 1개 중대를 만들어 중국군 지역 안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리고 쌀 배급 이외의 부식비는 현금으로 지급 받아 직접 시장에서 물건을 매입하고 있었다. 그들의 부대는 소규모였지만 경리장교도, 군의관도 있었다. 그들은 작건 크건 간에 무슨 일이든 나를 통해서 중국군에 의견을 상신했고 또 지시를 받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일본기술단에서 최대한의 기술을 빼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는 중국측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오늘날 일본의 첨단기술 전주 같은 것이었다.
약속시간에 그들 수용소에 간 나는 그날이 일본 4대 명절의 하나인 명치절이라는 것을 알았다. 명치절이 명치일왕의 생일인지 기일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그런 날이었다.
일본이 근대화된 것도, 제국주의 침략국가가 된 것도, 그리고 한국을 병탄해 버린 것도 모두 명치 때였다(1868∼1911년). 그 명치일왕 날에 내가 일본인들과 술을 마시다니. 나는 불현듯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 마주앉은 일본군 군의관 쓰바키(춘) 대위가 아까부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 부관님, 내가 나이치(내지)로 돌아간 후에라도 우리는 서로 편지왕래를 하십시다.』
나는 사단본부 부관처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인들은 나를 부관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만일 내가 일본군 탈출범이라는 것을 안다면 「일본 독종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면서 벌써부터 사단장은 나에게 중국군 대위로 위장하라고 했다.
편지왕래를 하자는 일본 군의관은 자기 딴에는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한 말이었겠지만 나는 참을 수 없는 울화가 치밀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옆에 놓인 술 주전자를 집어 군의관에게 내동댕이쳤다.
『군의관, 너 지금 뭐랬나. 나이치에 돌아가면 서로 편지하자고. 그래 좋다. 일본 본토가 내지라면 조선과 대만은 아직도 일본의 외지인 식민지란 말인가. 나는 조선사람이다(나는 그때처음으로 그들에게 조선인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다시 한번 「나이치」따위의 말을 써 봐라, 그때는 없다.』나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일본말을 모르는 중국장교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내 손을 잡아끌면서 왜 그러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사건 전말을 설명해 주었다. 그 사이 독이 오른 군의관이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심상치 않은 그의 거동을 보고 김영주는 곧 그의 뒤를 밟았다.
얼마 후 회식장소의 문이 삐걱하고 열리더니 군의관이 나에게 권총 한발을 갈겼다. 그리고 곧이어 두발의 총소리가 났다. 군의관은 『으윽』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군의관을 쏜 사람은 김영주였다. 뒤를 밟았던 김영주는 일본군의관이 숙사 뒤에 있는 대밭에 묻어둔 권총(무장해제 때 내놓지 않고 숨겨둔 것)을 파내는 것을 보고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나를 구한 것이다.
나는 왼쪽 손목에 총탄을 맞아 손목시계가 산산조각이 났고 손목 혈관이 찢겨 붉은 선지피를 뚝뚝 흘렸다.
대밭에 묻어둔 권총에 녹이 슨 탓으로 연발이 안되었기 때문에 나는 살아날 수 있었다.
김영주가 쏜 권총은 내가 호신용으로 그에게 준 것이었다.
사람의 운명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일본군에서 오도 가도 못하던 김영주를 내가 구출한 대신 그는 위기직전에서 나를 살려낸 것이다.
김영주는 권총의 명수였다. 그는 군의관이 죽지 않을 만큼 허벅지를 놨기 때문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부대 안에서는 그를 죽여버리자는 여론이 물끓듯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장개석이 말한 「보은이덕」이 적용되어 그는 무사히 귀국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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