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노사 또 '모호한 합의' … 누구 말이 맞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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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4시40분 울산 현대자동차 본관 4층에 마련된 임시 브리핑 룸. 노사 양측 대표들이 성과금 지급 합의서에 막 서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회사 측에서 A4용지 1장짜리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생산차질을 만회하는 조건으로 격려금 50% 지급, 고소.고발 및 손해배상소송 철회 안 해, 원칙 지켜지는 노사관계 전기 만들어…."

합의서의 문구를 그대로 옮겨 전해주기만 했던 종전과 달리 합의 내용에 대한 분석까지 달았다.

사측의 이 같은 협상 결과 발표 소식을 들은 노조 사무실은 발칵 뒤집혔다. "내용이 왜곡됐다"는 것이다. 오후 6시10분쯤 노조 대변인이 사무실에서 100여m 떨어진 기자실로 급히 달려왔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긴급:현대자동차 노사 간 합의내용 정정보도 요망'이란 제목의 브리핑 자료였다. 똑같은 합의문을 놓고 핵심 쟁점 두 가지에 대해 회사 측과 전혀 다른 주장을 폈다.

"성과금(격려금)을 2월 말까지 지급하기로 했으며 (생산목표 달성이라는) 조건이 붙지 않았다. 고소.고발 및 손해배상소송 문제도 조기에 원만히 해결토록 노사가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는 주장이었다. 한자리에 앉아 합의문에 각각 서명했는데도 각각의 해석은 이처럼 서로 달랐다. 이에 따라 합의문을 놓고 또 다른 마찰이 일지 않을까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성과금 조건부냐, 아니냐=합의문에 따르면 성과금 부분은 '노조는 2월 말까지 생산목표 미달 대수 만회에 최대한 협조하고, 회사는 그 시점에 목표 달성 격려금 50%를 지급한다'고 돼 있다.

노조 측은 '최대한 협조'는 말 그대로 협조일 뿐이지 회사 측의 주장대로 '생산목표 미달분을 만회해야 한다'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조는 "협조 조건부라는 의혹을 완전히 제거하고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손해배상소송 취하도 엇갈려=노조는 또 "합의서의 '노사는 금번 사태로 발생한 제반 문제에 대해 조기에 원만히 해결토록 최선을 다한다'는 구절 가운데 '제반 문제'에 '고소.고발 및 손해배상소송'이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회사 측은 "노조가 소 취하에 마지막까지 매달렸지만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합의문 어디에도 그런 문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번 성과금 사태도 모호한 임금협약서 때문에 발생했다. 지난해 8월의 협약서에는 "생산실적이 목표의 100%를 초과하면 한 달치 통상임금의 150%, 95%를 초과하면 통상임금의 100%를 성과금으로 지급한다. 단 지급률을 상기 달성기준 이상으로 조정한다"고 돼 있다. 이를 놓고 회사는 "목표를 달성해야 150%의 성과금을 준다"는 뜻이라고 했고, 노조는 "목표를 조정해서라도 성과에 상관없이 150%의 성과금을 지급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변호사도 "해석 불가"=현대차 노사의 합의문에 대해 변호사들도 "합의 문구만으로는 해석 불능"이라고 했었다. 박현갑 변호사는 "현대차 노사를 국내 대표 격인 노사라고 하는데 합의서 문구를 보면 한심한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박 변호사는 "합의문을 읽어 보면 각각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해 놓아 언제든 마찰이 일어날 수 있게 돼 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노사 간 핵심적인 이해가 걸린 첨예한 문제를 놓고'최대한 협조''제반문제''최선을 다한다'는 식의 애매한 문구를 나열한 것은 필요시 아무거나 내걸고 떼를 쓰기로 합의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울산=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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