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11회 삼성화재배 세계 바둑 오픈' 바둑은 실수의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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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삼성화재배 세계 바둑 오픈'

<4강전 2국 하이라이트>
○ . 백홍석 5단 ● . 이창호 9단

장면도(121~131)=흑은 백의 광활한 중앙을 견제하기 위해 흑? 두 점을 긴급 투입했고 그동안 백은 상변 흑진을 유린했다. 형세가 근접했다고 하지만 백은 여전히 한발 앞서 있는 상황. 그러나 이창호 9단은 아직 초조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121로 살아두고(아직 완생은 아니다) 123으로 퇴로를 확인하며 추격의 때를 기다린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백홍석 5단은 노타임으로 124로 짚어갔는데 아마도 당시엔 이 수가 얼마나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몰랐던 것 같다.

이창호 9단은 묵묵히 125로 뛰어나오며 횡재를 한 기분을 느낀다. 이런 명당을 그리 쉽게 차지한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124에 둔 이상 126은 어쩔 수 없는 수. 그때 127을 선수한 흑이 129에 못을 박자 우하 일대에 때아닌 운동장이 생겨났다. 어마어마하게 커 바둑은 그대로 역전이다. 이 9단이 별다른 노력을 한 것도 아니다. 조금 과장한다면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바둑은 역시 실수의 게임인가.

"말도 안 되는 수였어요.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웠어요."

훗날 한국기원에서 만난 백홍석은 124를 통렬하게 자책했다. 그는 '참고도' 백1이었으면 여전히 백이 우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24는 쉬운 수다. 그러나 승부의 격렬한 용광로 속으로 빠져들면 고수들도 종종 눈이 멀어 버린다.

이창호 9단의 실수로 지목된 131도 그런 격렬한 호흡 속에서 등장한 수다. 백의 다음 수는 어디일까.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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