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못받는 경제정책/개각후의 과제와 처방(시국 이것이 문제다: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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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부 공식발표도 안믿는다/부동산 대책 나오면 되레 폭등/정치권 눈치 보느라 “갈팡질팡”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당의 지지도가 10여%에 불과하고 이를 대체할만한 지지를 얻는 정치세력도 없는 것은 기이한 현상이다.
정치적 무관심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냉소」에 가까운 국민들의 정치관은 그들에 의해 임명된 행정관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선의의 관리자」로 인식되야할 정부가 「정권의 수호자」「특정계층의 이익대변자」 정도로 치부되는 일도 있다.
정부가 정책을 발표하면 그 이면을 의식하고 뒤집어 바라본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하면 이는 국민의 심사가 원래 비뚤어진게 아니라 비뚜로 보게끔 만들어온데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국불안의 온상인 정치판은 허구한날 싸움으로 소일하다 가끔씩 민생문제에 눈을 돌리겠다고 나서 되지도 않을 훈수로 일만 그르치기 일쑤다.
정치판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행정부의 장단맞추기에 정책은 갈팡질팡이다.
선거공약같은 것은 아예 안 믿기로한지 오래고 정부가 발표하는 각종 대책도 언제 또 바뀔지 몰라 액면 그대로 믿을 생각이 없다.
6공이 들어서면서 내건 가장 큰 깃발은 이른바 「경제정의」의 실현이었다.
경제정의의 실현을 위한 양축으로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이 등장했다.
5공때 한번 시도했다가 실패한 금융실면제는 국민들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고 따라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부」라면 분명히 뭔가를 보여줄 것으로 믿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실명제실시의 지지율은 80%를 웃돌았다.
그런데 결과는 역시 아니었다. 「현실적인 충격」을 감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적잖은 대가만 치르고 또다시 「유보」됐다.
80여%의 지지는 「이상」이고 10여%의 반발이 「현실」이었다.
감출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치고 입만 열면 정의를 논하던 정치권도 결코 「유보」에 토를 달지 않았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정치자금」으로 불리는 정치판의 뒷거래가 금융실명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금융실명제가 만병통치도 아니고 「현실적」 부작용이 생길 것이란 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도입시기와 적용단계,이른바 도강세같은 과도기적 조치 등에 보다 현실적인 대처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전한 사회,건강한 경제를 만들려면 충격을 감수하고라도 실시해야만 하겠다던건 정부였다.
토지공개념은 망국지병으로까지 불린 부동산투기를 막는 최선의 처방전으로 제시됐다.
금융실명제처럼 완전히 사산된 것은 아니고 각종 입법조치들이 취해졌다.
입법과정에서 굴절은 있었지만 종합토지세가 생겼고 토지초과이득세·개발이익부담금·택지상한제 등이 잇따라 도입됐다.
그런데도 땅투기는 잡히지 않았다. 지난해만도 전국적으로 땅값이 20.6%나 올랐다.
천문학적인 돈이 땅있는 사람들에게 덧붙여졌다.
땅값이 오르고 보유과세가 무거워진 만큼 세금이 엄청나게 더 걷힐 것 같았는데 종토세로 거둬들인 세금은 4천4백억원 정도에 불과했다.
어딘가 큰 구멍이 있다는 얘기다. 과표현실화가 그래서 또 제기됐다.
지난해 종토세의 과표는 공시지가의 15%에 불과했다. 공시지가를 실거래가의 80∼90%로 보는 점을 감안하면 1억원짜리 땅을 1천만원 남짓으로 쳐 세금을 매기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아우성이다.
「칼」탓만 하지말고 있는 「이빠진 칼」이라도 제대로 벼리어 써보란 주장이 훨씬 호소력 있다.
말잔치는 식상하다. 예컨대 요즘 문제되는 예산만해도 언제는 인플레 억제를 위해선 재정긴축이 필요하다더니 요새는 세입내 세출은 「통화중립적」이어서 물가와는 관계가 없다는 논의가 득세한다. 이래선 「아전인수」란 말밖엔 들을게 없다.
5월중 물가는 잡혀가고 부동산가격은 소강상태다. 최각규 부총리의 표현을 빌리면 「소중한 싹」이 자라고 있다.
이 싹이 제대로 크려면 선거과정에서 밀어닥칠 정치권의 못된 바람을 차단하고,필요할 때 갖다 붙이는 민의가 아니라 진정한 민의를 수렴해 흔들림 없이 가꿔 나가야 한다.
말보다 행동을,대책마련보다 엄정한 집행의지를 보여야만 「믿을 수 있는 정부」로 새로 태어날 수 있다.<박태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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