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과대성장 국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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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과대성장 국가(over-developed state)'. 나라가 너무 커졌다는 뜻이 아니다. 파키스탄 출신의 사회학자 함자 알라비가 1972년 내놓은 사회분석 모델이다. 식민지 지배를 당하다 독립한 개도국에서 왜 권위주의 정권이 쉽게 들어서느냐를 분석하는 데 쓰였다.

큰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식민지 시절 침략국이 통제를 위해 세워둔 각종 권력기구가 독립 후에도 그대로 남으면서 미숙한 시민사회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특히 침략국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관료기구.군.경찰 등이 과대성장 국가의 상징이다. 처음부터 이들은 미숙한 시민사회에 걸맞지 않게 너무 강하고 크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를 배경으로 독립 후 집권자는 쉽게 독재로 치달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과대성장 국가라는 이름도 시민사회에 비해 과대하게 성장한 국가권력 기구를 가리킨다.

이를 85년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광복 후 국가형성 과정에 적용해 널리 회자됐다. 당시 '먹물'들 사이에선 이 말을 모르면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였다.

우리의 경우 알라비의 모델에 반공 이데올로기와 경제성장 전략이 덧붙여졌다. 즉 반공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고도의 강제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국가기구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사불란한 성장 정책이 맞물려 행정 일변도의 관료 국가가 됐으며 이는 정당과 의회의 기능을 약화시켰다고 분석됐다.

과대성장 국가는 한때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전처럼 자주 인용되는 편은 아닌 듯하다. 우리의 시민사회가 상대적으로 성숙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오히려 참여정부 들어서는 권력기구보다 이해관계에 따라, 또는 분야별로 형성된 집단들의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 화물차주들이 국가물류를 마비시키는가 하면, 노조가 화염병을 던지며 과격시위에 나선다. 또 환경.시민단체 등이 국책사업을 가로막기도 한다. 사회 도처에서 자신의 이해가 걸리기만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집단행동에 나서려는 태세다.

거꾸로 공권력은 후퇴하는 모습이다. 그 공백을 메우며 집단이 약진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쯤 되면 '과대성장 집단'론이라도 나올 법하지 않은가.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