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영화 거장 랑 감독 탄생100주 회고전 정용탁<한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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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국필름보관소는 22일부터 31일까지 세계영화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독일 영화감독 프리츠 랑 탄생 1백주년 회고전을 열고 있다.
랑은 60년대 프랑스의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랑은 l890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뜻에 따라 l907년 비엔나 공과대학 건축과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곧 예술대학으로 옮겨 회화를 공부했다.
1차대전 발발로 육군에 자원 입대한 그는 네번의 부상으로 병원에 요양 중 단편소설·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 무렵 랑은 독일 영화감독 조 메이를 만나『기인 클럽에서 결혼식』의 시나리오를 써주고 그후 그의 조감독이 되었다. 1918년 독일의 저명한 제작자 에리히 포머에 의해 재능이 인정되어『잡종』(1919)으로 데뷔하게된다. 이 작품은 여인의 사랑에 의해 파멸되어 가는 남성을 다루었는데 이 주제는 그의 후기작품에서 자주 반복된다.
두번째 작품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범죄 집단 두목의 모험통속극『거미들』(1919)을 연출,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1926년 뉴욕을 방문했을 때 얻은 영감으로 1927년『메트로폴리스』를 완성, 독일 무성영화 시대의 최대감독이 된다. 그는 그후『간첩』(1928),『달속의 여인』(1929)을 만든 뒤 초기 토키영화의 걸작으로 한도시의 연쇄 어린이 유괴살인사건을 다룬『M』(1931)을 만든다. 당시 토키영화에 대한 미학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향의 미학적 적용을『M』을 통해 훌륭히 해냈다.
1933년 나치즘을 은유적으로 공격한『마부제 박사의 유언』이 검열에 걸려 상영이 취소되자 하르보우와 이혼, 파리로 심야에 탈출해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랑은 어머니가 유대계이므로 항상 나치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지냈다. 파리에서『릴리욤』(1934)을 만든 후 미국으로 망명, MGM과 작품활동을 재개했다.
1936년 집단폭력에 맞서 개인적 복수를 다룬『분노』를 시작으로 약 15편의 작품을 미국에서 연출했다. 그는 1960년 독일에 돌아와『마부제 박사의 천개의 눈』제작으로 감독 생활을 마감했고 l963년 장뤼크 고다르의 영화『경멸』에 출연한바 있다.
랑은 1976년 8월2일 로스앤젤레스의 베벌리힐스에서 86세로 타계했다.
그의 미국 생활은 매우 불만족스런 것이었다. 제작자들의 상업적 압력에 의해 그는 뜻대로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또한 비평가들의 평가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5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던 작가주의의 비평방식으로 앨프리드히치코크·하워드혹스와 함께 훌륭한 영화작가로서 재평가되었다.
그의 영화 장르는 범죄 스릴러물·이국적 모험극·공포드라마인데 한때 멜러드라마·서부영화를 연출한 적도 있다. 그의 작품 주제는 초기 독일의 무성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독일정신-활력이건 불행이건, 인간성에 대한 희망이건-과 사회적 환경에 대한 개인의 갈등, 신에 대한 개인의 갈등, 관습에 대한 갈등 등이다. 그의 작품의 주된 모티브는 복수, 폭력, 권력 남용, 암흑가, 환경에 적응 못하는 소외된 인간, 심리적 범죄 등이다.
랑은 사회제도 모순의 희생물로 범법자를 보았다. 그는 한때『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는 항상 절대권력자와 완전한 인간의 가면을 벗겨왔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특히 보여지는 뛰어난 건축미, 회화적 구도와 이를 통한 표현주의적 스타일은 그만이 갖는 독특한 작품 세계다.
위대한 영화작가의 대표작 14편을 그의 탄생 1백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감상한다는 것은 영화팬들에겐 가슴 설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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