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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략 <謀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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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금의 중국 산시(陝西)성 바오지(寶鷄)시 동쪽은 과거 진창(陳倉)이라고 부르던 곳이었다. 나중에 한(漢)을 세운 유방은 기원전 206년 당시 패권을 다퉜던 항우에게 밀려 이곳 서남쪽 한중에 정착한다. 진창이란 곳은 중원 지역에 해당했던 시안(西安) 일대의 관중 지역과 현재의 쓰촨(四川)을 잇는 교통 요지.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유방은 부하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인다. 관중에서 한중으로 이동하는 도중 절벽에 나무를 대서 만든 길, 잔도(棧道)를 불태운다. 힘센 항우가 차지한 관중 지역에 욕심이 없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계략이었다. 한중으로 몰려 나간 유방은 기회를 노리다가 불태웠던 잔도를 수리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자신의 진짜 목표를 숨기고 달리 목소리를 냄으로써 적의 이목을 분산시키려는 책략이다. 이어 유방은 최측근 장수인 한신과 그 휘하 병력을 보내 진창을 지나 관중 지역을 급습함으로써 나중에 한 왕실을 세우는 패업의 기반을 다진다.

겉으로는 잔도를 다시 수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속으로는 비밀리에 병력을 파견해 진창을 넘어선다는(明修棧道, 暗渡陳倉) 성어의 내용이다. 이는 지금도 중국에서 널리 활용된다. 적과 상대방을 속이는 대표적인 기만전술의 하나다. 나중에 중국인들이 엮은 '삼십육계(三十六計)'의 하나에 오를 정도로 중국 '모략(謀略)' 세계의 명품으로 자리 잡았다.

모략은 목적을 이루는 술수다. 불경을 찾아 떠나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은 모략의 뜻을 설명하는 좋은 예다. 뛰어난 무예를 갖춘 손오공이 없다면 덕 높은 고승(高僧) 삼장법사도 요괴들이 탐을 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삼장법사'라는 충분한 명분을 갖추지 못한다면 손오공 역시 천궁(天宮)에서 선도(仙桃)를 훔쳐 먹는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다. 명분이 부족한 모략은 그저 얕은꾀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최고의 모략은 인심을 읽고 시세에 충분히 부응하는 데서 나오는 셈이다.

대선을 앞둔 정치인들이 펼쳐 보이는 모략의 시절이 다가왔다. 한국이 처한 국제적 환경과 민심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은 모략이 횡행할까 먼저 걱정된다. 작은 사술(詐術)로 민심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정치인들은 이제라도 국민의 마음과 국제적 큰 흐름을 충분히 읽어야겠다.

유광종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