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든 불량품 우리가 산다|기업들「새벽시장」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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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중소의류업체인 세광실업 이철규 사장은 지난18일 여느 때와는 달리 새벽에 일어났다.
그 길로 서울 구로동 에스에스패션 유통 센터에서 열린 새벽시장에 나가 자신이 만들어 납품한 셔츠 3장을 1만6백원에 샀다. 그가 산 셔츠에는 가격표대신「마무리 불량」이라는 꼬리표가 달랑 매달려 있었다.
그가 이곳 새벽시장에 나간 것은 이날이 작년이후 네 번째.
연간 4억 원 어치의 의류를 에스에스패션에 납품하고 있는 그는 일단 물건을 넘기고 돈도 받았지만 품질검사 결과 불합격품을 싼값에 되삼으로써 반성의 기회를 갖자는 회사 측 제의에 따라 새벽시장이 열릴 때면 어김없이 직접 나타난다.
이 사장은 새벽시장이 끝나면 회사 관계자와 회의를 갖고 불량원인을 점검한다.
이 사장은 네 번에 걸친 새벽시장 덕분에 불량률을 0·08%(납품업체평균 0·23%)로 줄곧 유지할 수 있었고 우수 납품업체로 지정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이처럼 자기가 만든 불량품을 자기가 사도록 하는 새벽시장이 활발히 열리고 있다.
일단 돈을 받고 팔아 버리면 그 만이라는 그릇된 상행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자는 품질관리 운동의 일환이다.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금성사도 매달 한번씩 불량부품 새벽시장을 열고 있다.
8개 금성사 전 사업장에서 담당 사업부장과 납품업체 사장들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열리는 새벽시장은 납품업체 측이 불량품을 다시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장에서 자아비판을 해야한다 .불량요인과 그에 따른 대책을 상세히 브리핑해야 한다.
납품업체가 아닌 자사 공장 근로자들로 하여금 자기가 만든 불량품을 사게 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3월15일 삼성시계 창원공장에서 열린 금성시계 제1회 야시장」에서 이 공장 조립과 유중길 차장과 생산1과 오태석 과장은 시계부품인 밴드핀 등 불량부품 10여 점을 사야 했다.
커다란 글씨로「WORST10」이라 쓰여진 종이 밑에 자신들이 만든 불량품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돈을 얼마를 주더라도 빨리 사서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는 삼성시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물론 되사는 가격은 시중가격의 10분의1도 안 되는 아주 형식적인 수준이지만 회사측은 근로자들이 자기가 만든·불량품을 구입, 다시 연구한 결과 개선실적이 좋을 경우 시상도 하고 있다.
삼성시계 측은 근로자와는 별도로 납품업체 사장들을 대상으로도 새벽시장을 별도로 열고 있다.
새벽시장에서 다섯 번 이상「WORST10」에 뽑히면 거래중지의 조치를 하기로 납품 업체들에 사전 통보했다.
대기업들 중 새벽시장을 가장 먼저 연 곳은 현대자동차.
자동차 1대에 2만여 개의 부품이 들어가며 1개의 잘못된 부품이 자동차자체를 불량품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부품관리에 일찍 눈을 떴다.
지난87년 엔진관련 부품을 중심으로 시작한 현대 자동차의 새벽시장은 불량부품을 4분의1정도 줄일 정도로 지대한 역할을 했다. 작년 초부터는 불량부품이 거의 나오지 않아 새벽시장을 중단했으나 5월부터는 품질유지를 위해 재개할 계획이다.
새벽시장은 국내업계의 품질관리 운동의 새벽을 열고 있다. <이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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