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정치 흉내는 내지말자/권순용(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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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방자치시대의 막이 올랐다. 30년만의 지방의회 부활이다. 약속대로면 광역의회도 곧 구성된다. 잇따라 시·군·구청장은 물론 시·도지사도 주민이 뽑게 된다.
우리 정치사에 지방정치라는 새 장르가 태어나고 있다. 기초의회는 정당이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는 없을 수 없다.
정치란 별게 아니다.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군사정부에서는 군인이 맡아왔고,권위주의시대에는 권력자나 그의 사돈팔촌이 그 역할을 맡아왔다. 중앙집권체제에서는 임명권자의 눈치를 먼저 살펴야 하는 행정관료의 몫이었고 심지어는 국회의원이 이권화해온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그것은 지방의회가 행사할 지방정치의 몫이다. 지방정치는 참여정치다. 주민의 뜻을 가장 쉽게 정책결정에 반영할 수 있는 정치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새로 탄생한 지방의회에 거는 기대는 크다. 주민의 뜻과 밀착된 의사결정이나 정책결정을 할 수 밖에 없는 특성 때문이다.
지방의원의 힘은 그 지역 주민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권력자의 비호일 수도,임명권자의 눈치일 수도,정당의 당략일 수도 없다. 그런 이유때문에 이번에 탄생한 지방의회는 어느 하나도 본받을 기성의 틀이 없다.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가면서 새로운 정치를 보여주어야 할 미개척지가 있을 뿐이다.
우리 국민은 지금껏 통제사회에서 군림하는 권력자나 중앙집권 풍토에서 위만 보고 일하는 관료에 시달려만 왔다. 지역에서 주민의 이해관계를 다루면서도 주민에게 책임지는 정치나 행정은 보기가 어려웠다. 지방자치시대의 단체장이나 의회만이 그런걸 보여줄 수 있다.
국민은 그래서 더욱 지방정치가 그런 기성정치를 정화해 주기를 기대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첫회의에서 일부지방에서는 기성정치의 구악 흉내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대체로 유권대중의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고 행동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줬다.
윤리강령을 만들어 몸가짐을 가다듬었다. 특별위원회를 부랴부랴 만들어 지역주민의 절실한 문제에 부딪쳤다.
보스의 눈치나 보고 공천권을 의식해 그들에게 비굴한 모습까지 보이는 국회의원들을 적지않게 보아온 국민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선거에서 정당배제의 소리가 컸던 것도 다름아닌 기성정치인들의 구태가 싫어서였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사상 유례없는 깨끗한 선거를 치러냈다. 우리 유권자들이 돈으로만 매수된다는 자학적 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지방의원들이 실천적으로 보여줬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정치의 앞날에 새로운 가능성의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앞으로 전개될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의 탁류를 정화할 청정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돈을 써야 국회의원이 될 수 있고,이권에 눈독을 들여 부정하게라도 자금을 모아야 다음 선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한 정치에 희망은 없다. 오히려 그런 정치인은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인식을 모두 공유하지 않는한 참신한 정치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 부활되는 지방정치가 밑에서부터의 자극제로 기능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무력감에 빠진 국민들에게는 새로운 청량제가 아닐 수 없다. 4년 또는 8년후 우리는 유권자에게 튼튼히 뿌리내린 수많은 새 정치인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지방의원들이 진지하게 펼쳐나갈 풀뿌리민주주의 역군으로서의 활동에 대한 기대다.
출발에서 보여준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를 받을만 하다.
정치발전은 물론 더 나아가 민주발전에도 결정적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해 볼만하다.
주민참여의 지방자치없이 민주발전은 없다. 민주주의는 결국 사상이나 이념이기보다 생활방식이고 행동기준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아니라 행동이다. 직접 실천하는 기회를 갖게되는 지방정치를 통해 민주주의는 확실히 발전해 간다.
문제는 앞으로 지방자치를 얼마나 정성들여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느냐에 있다. 집권자나 국민,그리고 지방의원 스스로가 다시 돋아난 싹을 소중하게 키워갈 책임을 함께 갖고 있다.
집권자는 지방자치가 번거롭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민참여 없는 정치제도로는 부단한 체질개선을 통한 체제유지가 앞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에 눈떠야 한다. 과감한 권한이양으로 수평적 권력분립과 함께 수직적 권력분립장치를 갖추지 않으면 스스로 죽는다.
가장 중요한 버팀목은 역시 유권자인 국민이다. 뽑는 일만이 아니다. 감시하고 지역의 공동이익을 앞세우고 사사로운 주문을 자제해야 한다. 그럴때만이 불순한 권력이나 힘이 함부로 넘보지 못하고 지역대표를 지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의원 스스로의 몸가짐은 더욱 중요하다. 새 길은 확고한 목적의식이 있는 사람만이 열어갈 수 있듯,주민의 대변자,국민의 대변인이란 신념을 다시한번 가다듬어야 한다. 서툰 흉내는 금물이다.
흉내내도 좋을만한 모델은 없다.
교사는 민초고 교본은 민심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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