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인화한 듯한 … 조선시대 초상화 31건 보물 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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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디지털 카메라로 자기 얼굴을 척척 찍어내는 시대다. '얼짱'이 뜨고 '몸짱'이 각광받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도 얼굴과 몸을 중요하게 여겼다. 생전에 자신의 모습을 담아 후손에 전했다. 화가도 일류급이 동원됐다. 후손들은 조상의 영정(影幀)을 신주처럼 모셨다. 전란이 일어나도 영정을 잃어버리는 일이 적었다. 영정은 제사의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는 수준 높은 '초상화 문화'를 이뤄냈다. 웬만한 고관(高官)치고 번듯한 초상 한두 점을 남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반면 지금까지 초상화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그리 높지 않았다. 초상화를 미술품보다 의례용품으로 보는 생각이 앞섰던 까닭이다.

문화재청이 '초상화의 재발견'을 선언했다. 전국의 개인.박물관 등이 소장해온 초상화 31건(함.향낭 등 관련유물 포함 80여 점)을 2일 보물로 일괄 지정했다. 지난 1년 공모한 초상화 중 예술적.학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엄선했다. 현재 국보.보물로 지정된 초상화는 총 37건. '보물급' 초상화가 두 배로 늘어난 셈이다.

?털 하나도 놓치지 마라=성균관대 조선미(문화재위원) 교수는 "사대부들은 털끝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고 말했다. 초상화에서 수염 하나, 머리칼 하나라도 놓치지 않았다는 것. 일본의 초상화가 해당 인물의 특징.요체에 집중했다면 한국의 초상화는 실제 인물을 재현하는 기량이 뛰어났다고 설명했다.

조선 후기 채제공(1720~99)의 초상이 그렇다. 현대판 세밀화를 보는 느낌이다. 명암법을 적절히 구사해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옷 주름 하나에도 입체감을 실었다. 평상복.관복 등 옷의 용도에 따라 전체 분위기를 달리했다. 조선 후기 문인 초상화의 각종 유형을 완비한 것으로 평가된다.

?마음과 정신을 담아라=우리 초상화의 기본 원칙 가운데 '전신(傳神)'과 '사심(寫心)' 이 있다. 사진처럼 외형을 모사하는 '형사(形似)' 위에 개별 인물의 내면, 즉 마음과 정신을 담아내려고 했다. 초상화란 무릇 사람의 영혼까지 뚫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일례로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98)의 초상에선 당찬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초상화 다섯 점의 복식이 모두 다르며 각종 의관.기물 또한 성대하다.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는 황현(1855~1910)의 초상에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걱정했던 구한말 애국지사의 충정이 전해진다. 조계(1740~1813), 조두(1753~1810), 조강(1755~1811) 형제를 한 화폭에 담은 '조씨 삼형제 초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집단 초상화'다.

조 교수는 "초상화는 과거의 복식.의례 등을 연구하는 기초자료"라며 "이번 보물 지정이 회화.불화 등에 비해 저평가돼온 초상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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