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요상한 주인공들 … 시대만큼 요상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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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래의 사람 또는 짐승(여하튼 살아있는 것들)의 공통점을 혹 아시는지.

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못하는 선별적 청각 마비인

② 어느 날 미확인비행물체(UFO)를 타고 지구에 상륙한, 그리고 목욕탕에서 내 등을 밀어주는 너구리 한 마리

③ 왼손으로 셈을 하는 왼팔 없는 노인네

④ 자신의 오리 다리를 잘라내기 위해 녹슨 못을 박은 20대 여성 C컵꽃띠

이 괴상망칙한 사람 또는 짐승은 의외로 근자의 한국문학과 관계가 깊다. 이 여하튼 살아있는 것들은, 최근 출간된 한국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이다. 순서대로 출처를 밝히면 아래와 같다.

①은 강병융의 장편 '상상 인간 이야기'에 출연하고 ②는 박민규의 단편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③은 이장욱의 장편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④는 안보윤의 장편 '악어 떼가 나왔다'에서 각각 열연한다.

이 괴이쩍고 난데없는 등장인물이 한국 소설에서 활개를 치는 이유는, 사실 빤한 구석이 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 또는 사람 흉내 내는 짐승에게서 사람 됨됨이를 찾는 것이다. 가령 박민규의 너구리는 음식점에서 늘 '항상 먹는 걸로'를 주문하고 언제나 '알겠습니다''맡겨만 주세요'라고 시원스레 대답하는 샐러리맨을, 모종의 비웃음과 함께 가리킨다.

이러한 경향을 따르는 또 한 편의 장편소설이 있다. 김언수(34.사진)의 '캐비닛'(문학동네)이다. 소설은 말하자면,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총정리 완결판이랄 수 있다. 소설은, 아니 1980년대 동사무소에서 봤음직한 볼품없고 낡아빠진 캐비닛은 무려 375명의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기록으로 그득하다.

거기엔, 자신의 기억 일부를 삭제한 메모리모 자이커, 시간을 잃어버린 타임스키퍼, 몇 달이고 잠만 자는 토포러,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동시에 지닌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서로 육체를 교환하는 다중소속자, 침대 밑 악어에게 잡혀먹힌 블러퍼 등등의 기록이 꾹꾹 쟁여있다.

소설은 이들을 '심토머(symptomer)'라고 부른다. 징후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인류가 현재 환경에 적응하기엔 이미 수명을 다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종이 출현해야 하는데, 그 새로운 징후를 보유한 신인류가 심토머란 설명이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맨 먼저 뭍에 오른 물고기와 비슷한 개념이다.

개념만 보면 참신하다. 바야흐로 인류의 멸종을 고할 때가 도래했다는 섬뜩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하나 심토머 개개인은 어딘가 낯이 익다. 타임스키퍼.토포러 따위는 무기력한 현대인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박민규의 너구리가 떠오르고,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와 같은 성적 판타지 가득한 인물은 강병융 소설에서 여럿 발견된다. 안보윤의 C컵꽃띠는 기억을 없앤 메모리모 자이커보다 한 술 더 떠 다리를 잘라낸다.

그럼에도 소설은, 몇몇 경구와 같은 구절에 힘입어 빤함을 넘어선다. 개중 두 대목만 옮긴다.

'당신은 영원히 마법사를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법사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꿈꾸기를 멈추었기 때문이다(141쪽).'

'무서워서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인간들. … 그런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고작 서른두 평짜리 아파트 한 채가 전부지(251쪽).'

요즘 우리네 삶, 번듯한 정신으론 못 봐줄 지경인가 보다. 얼마나 사람답지 못하게 살고 있으면,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 떼거리로 나와 한국 소설 복판에서 난장을 칠까.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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