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고야의 그림이 증언하는 '괴물' 같던 종교재판의 광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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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고야의 유령
밀로스 포먼.장 클로드 카리에르 지음
이재룡 옮김, 현대문학, 364쪽, 9500원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괴물'이 그린 그림은 보는 사람들을 영 편치 않게 했다. 팔 다리가 뚝뚝 잘리고 피를 흘리는, 광기와 야만의 현장이 그의 캔버스를 주름잡았다. '괴물'의 이름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 그런 고야가 왕들의 총애를 받던 궁정화가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이 소설은 고야의 화풍과, 종교재판의 광풍이 휩쓸던 시대 배경에서 힌트를 얻은 팩션이다. 유럽 왕실 간의 복잡한 혈통 맺기와 힘겨루기를 비롯해 프랑스 대혁명과 종교재판소의 부활, 나폴레옹의 등장 등 역사의 흐름을 바꿨던 사건들이 묵직하게 자리잡아 시대물로서의 잔재미가 톡톡하다. 시대와 상황의 부조리함 앞에 인간의 운명이란 것이 얼마나 나약한가 하는 주제의식도 꽤 솜씨 있게 심어놓은 편이다.

때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 프랑스를 시발로 유럽은 온통 혁명의 물결에 휩쓸린다. 가톨릭군주제의 오랜 전통을 지닌 스페인은 도전받는 권위를 지키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앞세워 이단을 엄히 다스린다. 부유한 상인의 딸인 열여덟살 소녀 이네스가 희생양이 된다. 걸려든 이유는 '막걸리 반공법'만큼이나 우습기 짝이 없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유대교도가 틀림없다." 조상 중에 유대인이 있다는 조사 결과도 나온다.

이단 단속의 선두에 선 사람은 뛰어난 두뇌와 재능, 야망을 두루 갖춘 로렌조 신부. 그가 감시단원들을 교육하는 장면은 중세 가톨릭이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비합리성의 정수를 느끼게 해준다.

"성호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혹은 세 손가락으로 긋는 사람들, 우리와 비슷한 생명이 다른 혹성에도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사람들, 토요일날 굴뚝에 연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오줌을 눌 때 아랫도리를 유난히 숨기는 사람들, 보름달이 뜬 밤에 저녁식사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냉철한 이성을 지녔다고 자부하던 로렌조가 감옥에 갇힌 이네스를 만나면서, 두 남녀와 그들의 초상화를 그린 고야는 시대의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고야의 유령'은 군더더기가 거의 없는 묘사 덕분에 책장이 어렵지 않게 넘어간다. '아마데우스'의 밀로스 포먼 감독과 '프라하의 봄'의 시나리오 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쓴 덕분이다. 이네스의 아버지 토마가 로렌조를 초대, 종교재판소가 딸에게 했던 식의 밧줄 고문을 한 뒤 "나는 침팬지 엄마와 오랑우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원숭이"라는 자술서에 서명받는 장면 등 '영화적' 대목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다만 제목을 보고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고야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불평할 수는 있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야가 목도한 시대의 광기가 주인공이다. 관찰하고, 그 내용을 자신의 온몸으로 해석해 화폭에 옮기는 화가야말로 목격자로서 안성맞춤일 터이니.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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