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사의여행스케치] 아르헨티나 - 엘 아테네오 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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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 상업가인 플로리다 길은 선물을 사려는 인파들로 가득했다. 그 사이에서 거리의 땅고(탱고) 무용수들은 지난날의 영광을 슬픈 춤사위로 추억하고 있었다.

수십 년 된 카페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에스프레소 한 잔을 앞에 두고 경쟁적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현대식 쇼핑몰에선 산타할아버지가 반바지를 입은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주며 땀을 뻘뻘 흘렸다. 바야흐로 남반구의 연말이었다.

거리 곳곳엔 서점들이 제법 많았다. 이방인의 눈으로는 과연 수지가 맞을까 걱정스러워 뵈는 작은 책방들이 열심히 12월의 여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입구 가판에는 새해 달력과 다이어리들이 가득했다. 그중 한 곳에 들러 사진이 많은 책들을 집중적으로 들춰봤다.

한 여행안내서에 소개된 작은 사진이 호기심을 끌었다. '엘 아테네오'라는 체인 서점의 한 지점을 소개한 것이었다. 손바닥에 주소를 옮겨 적었다. 산타페 애비뉴 1860번지(Av. Santa Fe, 1860).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 양반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알겠다는 신호가 왔다. 멀지 않은 곳이었고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바로 서점 안으로 들어서니 별천지가 펼쳐졌다.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옛 극장을 서점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옛 무대는 카페로, 객석은 서가로, 그리고 4층 객석은 갤러리로 변신시켰다. 과거 아르헨티나가 '아메리카의 유럽'이라 콧대를 세우던 시절의 영화가 얼핏 보이는 듯도 했다.

1919년에 극장으로 문 연 이 공연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아르헨티나 최초의 영화관ㅁ으로 바뀌었다가 2000년 서점으로 다시 변신했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떠오르는 명물이라는 것이 서점 직원의 설명이었다. 책들을 관객 삼아 무대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잠시 배우가 되어 보는 경험을 했다. 아르헨티나는 역사가 긴 나라는 아니지만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오영욱 일러스트레이터·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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