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칼럼

박정희 따라 하기, 뭐가 문제인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국제정책대학원은 매년 개발도상국의 엘리트 공무원 50여 명이 석사과정을 밟는 곳이다. 그쪽 공무원들끼리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건너와 1년 동안 한국의 경제개발 경험을 배운다. KDI의 조동호 기획조정실장은 "개도국에 '한국형 모델'은 여전히 유효하며 선망의 대상"이라고 소개한다. 유학생들은 대개 포항과 울산의 산업시찰 때 가장 감동을 받는다고 한다. 한국형 개발모델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더 열심히 공부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귀국할 무렵에는 박정희.이병철.정주영, 이 세 사람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꿰게 된다.

최근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 대권주자들의 '박정희 따라 하기'를 비판했다. 외모를 흉내 내려 선글라스를 끼거나 박 대통령의 생가를 앞다투어 찾는 현상은 문제라는 것이다. "퇴행적 성형수술로 상당한 패착"이라는 친절한 해설까지 붙였다. 정책 대결보다'박정희 향수'만 자극한다면 당연히 비난받을 일이다. 이미지 정치를 경계하는 의미에서도 일리 있는 훈수다. 하지만 박정희 따라 하기를 곧바로 군사독재로의 회귀로 연결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자 정치적 꼼수다. 오히려 산업화의 성공모델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선진국 문턱까지 올라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에는 땀과 눈물로 공헌한 리더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노무현 정부는 과거사 청산에 애를 쓰고 있지만 그 에너지의 일부를 좀 더 발전적인 쪽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역사적인 리더들을 발굴하고 이들을 새로운 역할 모델로 삼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때로는 우상 만들기도 필요한 법이다.

노 대통령이 열심히 보라고 권하는 KTV를 보면 아마 이 정부는 김구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것 같다. 노 대통령은 링컨 대통령으로 말을 갈아타기 전까지 백범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노무현-상식 혹은 희망'). 현실에선 좌절했지만 올바른 명분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김구 선생은 본받을 점이 많은 위대한 인물이다. 하지만 세계화되고 다원화된 정보화 사회에서 김구 선생이 적절한 역할 모델인지는 의문이다. 지나치게 민족과 통일을 강조하는 이 정부의 이념적 편향 때문이 아닌지 짚어볼 대목이다.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密雲不雨'(밀운불우.구름이 짙게 드리웠으나 비는 오지 않는다)를 선정했다. 답답하고 불안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리더십 위기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국민 불만도 임계점에 달했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리더십 빈곤과 비전의 실종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박정희 따라 하기는 한나라당이 아니라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이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권위주의.산업화 시대의 리더십과 비전을 민주화.정보화 시대에 맞게 변형시켜서 말이다.

왜 캐나다의 멀로니 총리나 미국의 해밀턴 프로젝트처럼 자꾸 외국에서 역할 모델을 찾으려 하는지 모르겠다. 국내에도 찾아보면 성공 모델이 적지 않다. 기업가 정신을 북돋우고 기업들이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그렇다면 반도체와 조선.자동차에 승부수를 던진 이병철.정주영 회장 같은 인물을 사회적 우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선진국 진입을 위해 제2의 경제 도약이 필요하다고? 그렇다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부터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집권여당은 '박정희 따라 하기'를 비난하기 전에 그의 경제개발 정책을 한번쯤 공부했으면 한다. KDI 대학원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울 청량리에 있다. 이 대학원의 정책학 과정은 입학만 하면 예산지원으로 수업료도 공짜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