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의 세상(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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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누가 공자에게 얘기했다. 『세상에는 이렇게 건망증이 심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글쎄 이사를 가면서 자기 아내를 잊어버리고 갔답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는 하나도 우습지 않다는듯 이렇게 대꾸했다.
『건망증으로 말하면 옛날 걸과 주라는 군주는 아내는 고사하고 자기자신을 잊고 있었다네.』
멀리 공자얘기까지 꾸어다댈 것도 없다. 우리는 요즘 자기자신을 잊고 사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고 있다. 전직 서울시장과 현직 서울시장의 「수서분양」사건을 둘러싼 책임 떠넘기기 시비가 바로 그 경우다.
어이없는 일로 가뜩이나 온세상이 침울한데 그릇이 제대로된 공직자라면 서로 『내 탓이오』하고 나설만도 하다. 현직이든 전직이든 그들은 당사자들이 아닌가. 그쯤되면 국민들도 마음이 후련하고 인물 됨됨이에 감명이라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입장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무슨 코미디언이라도 된듯이 밤중에 국민들을 웃기는 막간의 희극을 보여주었다. 누가 먼저 문제의 서류에 사인을 했느니 말았느니 듣기에도 민망한 얘기들을 전화통에다 대고 늘어놓았다.
설마 그러면 허물이 말끔히 벗겨지고 국민들도 속시원히 납득시킬 수 있다고 믿은 것일까.
군자는 의리에 밝고,소인은 이문에 밝다는 공자말씀은 백번 옳다. 서양의 속담에도 큰 사람은 이상을 얘기하고,보통사람은 사건을 얘기하며 소인배는 사람의 일을 얘기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보아도 우리는 그 소인들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하루도 나라가 편안한 날이 없고,무슨 일이 터졌다하면 소인들의 입씨름으로 귀가 따갑고 정신이 산란하다. 사건들의 배경을 보면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음모들이 숨어있는 것 같고,그럴수록 국민들의 마음은 불안하고,걱정스럽고,살맛도 잊게 된다.
법도 법이지만 그 많은 행정지시와 그 많은 엄벌 경고와 권세 가진 사람들이 말끝마다 하는 다짐들,어디 그뿐인가. 정부의 방대한 조직과 기구들과 감시의 눈들은 다 어디 가고 국민들은 생각만해도 어지러운 사건들에 휘말려 언제까지 한숨을 토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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