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수십억 년을 기다려 부르는 연애가 아닌 사랑의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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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과학 학설에 따르면 태초에 지구와 달의 거리는 지금의 3분의 1 정도였다. 달의 영향으로 지구의 자전시간도 짧았다. 다시 말해 지금보다 하루가 짧았고, 지금보다 더 많은 하루와 하루가 쌓여야 한 해를 채울 수 있었다. 하여 아래와 같은 사랑시가 가능할 수 있었다.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달이 커 보였던 때/일년은 팔백일이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내려 덮이고/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 있었다/…/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 보였던 때/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허나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은/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길//달과 지구의 자리가 멀어져 달이 작아보일 때까지/일년은 삼백육십오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일 때까지'('봉인된 지도' 부분)

시에서 나는,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일년이 800일이고 하루가 11시간이었던 때의 당신을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일년이 500일이고 하루가 16시간이었을 때 나를 데리러 왔던 당신의 말도 기억한다.

무릇 사랑이란 이 정도여야 하는 것이다. 수십억 년 전 당신의 뒷모습도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릇 기다림도 이래야 하는 것이다. 수십억 년이 흘러도 내가 지켜야 할 약속쯤은 고이 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수백 년 전 황진이는 '님 기다리던 동짓달 기나긴 밤을 반으로 베어내겠다' 노래했지만, 지금의 시인은 수십억 년을 당신만 기다렸다고 말한다. 수십억 년이라면 영원이라 불러도 무방할 터인데도, 시인은 굳이 그 영원의 시간을 하나하나 손꼽아 세며 앉아있다. 처절하고 섬세하고, 한없이 안쓰럽다.

이토록 여린 심장을 지닌 사내의 이름은 이병률(사진)이다. 서른아홉 살이고, 두 번째 시집 '바람의 사생활'(창비)을 막 냈다. 라디오 방송작가를 15년 넘게 했고, 목돈만 생기면 쿠바니 터키니 홀로 여행을 떠난다.

'당신을 중심으로 돌았던/그 사랑의 경로들이/백년을 죽을 것처럼 살고 다시 백년을 쉬었다가/문득 부닥친 한 목숨에게/뼈가 아프도록 검고 차가운 피를 채워넣는 일'('피의 일' 부분)

무릇 사랑이란 이토록 아픈 것이다. 문득 부닥친 한 목숨에게 뼈가 아프도록 상처를 남기는 일은,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저녁의 습격' 인용)이기에, 사랑이란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사랑의 역사' 부분)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가혹한 것이다. 수십 년 전 백석은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노래했지만, 시인에게 사랑은 '폭설처럼 먹먹한'('견인'인용) 것일 뿐이다. 그래서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닌 것이다'('당신이라는 제국'인용).

그렇다고 연애시라고 부를 순 없겠다. 시인의 노래가 사랑의 소나타만은 아니어서이다. '며칠에 한번쯤 통장을 들여다보'면서 '당신도 목숨 걸고 자본주의의 풍경이 되는 일을 합니까'('저녁 풍경 너머 풍경' 부분)라고 묻는 연애시는 본 적이 없다. 사랑시다, 간곡한. 당신을, 그리고 나를 향한.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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