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원의 용기와 절망(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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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딸자식 키우는 사람이 그런 광경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면 천벌을 받지요.』
5일 오전 서울 길음시장 골목에서 강간치상범을 붙잡아 경찰에 넘긴 환경미화원 박성근씨(41·서울 길음1동)는 주위의 칭찬을 오히려 쑥스러워했다.
박씨는 이날따라 몸이 무겁고 일손이 잡히지 않아 오전 1시40분쯤 평소보다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길음시장옆을 지나는데 물건더미 사이에서 『사람살려』라는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어간 박씨는 20대 범인이 딸또래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여자 목을 조르며 성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범인으로부터 여자를 도망시켜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범인을 밀치고 여자를 피신시킨뒤 박씨는 도망가려는 범인과 10여분동안이나 치고 받으며 엎치락 뒤치락했다.
이때 행인 몇몇이 현장을 일부러 피해 멀리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박씨는 남의 도움을 청할 겨를도 없이 있는 힘을 다해 술취한 범인을 때려 누인뒤 인근 파출소로 끌고갔다.
경찰조사결과 범인은 정해찬씨(23·트럭운전사)로 4일오후 11시40분쯤 길음시장옆 주택가에서 자기집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 최모양(20·회사원)을 위협,2시간동안 끌고다니다 폭행하던 중이었다.
담당형사가 계속 장한일을 했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지만 박씨는 남의 곤경을 나몰라라하며 피해가는 비정한 사회현실에 절망감을 느낀듯 썩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양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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