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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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가느다란 녹색 잎을 칼처럼 뽑아내고 긴 꽃대머리를 우뚝 세워 청아한 모습으로 방향을 풍긴다.
봄·여름에는 청초함을 드리우다 단풍이 오색으로 물들면서부터 겨울에 유독 꽃을 피운다.
봄이 싫어서일까, 여름이 지겨워서일까, 아니면 낙엽이 지는 가을과 초겨울이 「계절의 연인」인지 모른다.
제주 한란.
추울 때 꽃을 피운다해서 한란으로 유래된 이 꽃은 영산 한라산이 자생지.
바람 세고 돌 많은 제주에서 배수가 잘 되고 광도가 약한 숲 속이나 숲 가장자리 남향을 골라 드물게 서식하는 조건이 다른 난보다 까다로워 국내 자생난중에 가장 귀하다.
그런 만큼 일반 난에서 느낄 수 없는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한 속의 한란 꽃은 집안 어디에다 놓아두어도 그 향기로 난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은은한 향기는 텅 빈 집안을 가득 채우고 생기 찬 잎은 집안을 지키는 자세로 고고함을 더한다.
그래서 예부터 선비들은 한란을 「난중의 난」으로 꼽았다. 명품 한란 한 분을 갖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문방사지(종이·붓·먹·벼루)가 놓인 사랑채의 서안 위에 향기 그윽한 한란을 올려놓고 책을 읽는 선비의 모습은 한 폭의 풍광이었으리라.
멋을 중요시 여긴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한 난을 가리켜「선비의 상」으로 삼았다.
꼿꼿한 잎, 도도한 꽃대머리의 자태에다 맑은 공기와 물이 적당한 곳이 아니면 살지 않아서만이 아니다.
12월 눈을 맞고도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허허로움은 다른 난에 비길 수 없다.
한란이 오늘에 이른 것은 헌종6년(1840)에 제주로 유배간 추사 김정희 선생이 9년간 적거 생활을 마치고 제주를 떠날 때 『조선에서는 단 하나뿐인 꽃을 봤다』는 것이 효시다.
1백50여 년 전에 발견된 한란은 그러나 무차별한 채취로 멸종위기에 몰려 지난 67년 천연기념물 191호로 지정됐다.
귀한 한란 꽃을 보려는 애호가들이 늘어나자 인공배양에 의한 번식연구를 해오던 제주도 농촌진흥원이 지난11윌 10년만에 꽃을 피우는데 성공해 「멋의 대중화」를 낳았다.
한란 꽃은 한번 피면 대개 30∼45일정도 가지만 다음해 더 좋은 꽃을 피우기 위해 개화10일만에 꽃을 잘라야 하는 아픔을 참고 산다. <글 탁경명 기자 사진 신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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