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칼럼

너무 심하게 공부 권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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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아는 게 힘이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게 다가올 때도 없다. 매일 신문지면에 등장하는 키워드나 용어 설명 외우기도 벅차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야 뭘 몰라도 "공부하세요!"라는 핀잔과 함께 한 대 얻어맞으면 그만이지만, 최근 시사용어들은 사정이 다르다. 제대로 모르면 금전적 손실은 물론 일상생활에 이만저만 지장을 받는 게 아니다. 아파트 하나 장만하려 해도 미리 알아야 할 상식이 한둘이 아니다. '총부채상환비율(DTI)'이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쯤은 술술 나와야 "뭘 좀 아시네"라며 사람대접을 받는다. 외국 부동산 금융전문가들 사이의 은밀한 전문 용어가 이 땅에선 일반상식 용어로 굳어졌다.

돌이켜 보면 외환위기 이후 우리는 공부에 쫓기며 살아왔다. 정말이지 너무 심하게 공부를 권하는 사회가 된 느낌이다. 제대로 화제에 끼어들려면 외워야 할 게 너무 많다. 부동산이면 부동산, 외교면 외교, 다양한 분야마다 전문가 뺨치는 수준의 상식을 요구한다. 잠시라도 공부를 게을리 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다.

외환위기 때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BIS가 규정한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에 은행원은 물론 온 국민이 울었다 웃었다 했다. 그 비율이 8%가 안 되면 모두 죽는 줄 알았다. 석 달 전 '바다이야기' 때도 마찬가지다. 정확한 개념도 모른 채 연타기능.예시기능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달달 외웠다. 북한 핵실험 때는 어땠는가. 첨단 핵물리학에 나오는 플루토늄이 어떻고, 우라늄 농축이 어떻고는 기본 상식이 됐다. 이제 누구든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이나 한.미안보협의회(SCM) 같은 전문 용어를 줄줄 꿰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황우석 박사 사건 때만큼 열심히 공부한 적도 없다. 모두 유전생물학 박사가 됐다. 콩나물 줄기를 다듬던 가정주부가 줄기세포에 빠삭해졌고, 군대 박격포의 사촌인가 싶었던 배반포가 세포 분화 과정의 하나라는 사실도 새로 깨쳤다. 처녀생식만 해도 그렇다. 처녀들이 살 빼려 솔잎가루 먹는 것이라 여겼는데, 정자 없이 난자 혼자서도 새끼를 낳을 수 있다니…. 남자들에겐 하늘이 노래지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뒷맛은 씁쓸하다. 우선 외우기는 어려운데 유통기한이 너무 짧다는 사실이다. 길어도 석 달, 대개 한 달만 지나면 유통기한이 만료되는 잡동사니 지식들뿐이다. 왜 온 나라가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정부와 전문가들이 미리 사태를 파악하고 대비책을 세웠다면 이런 국가적 에너지 낭비는 막지 않았을까 싶다. 아파트를 제때 공급하고 시중의 과잉유동성만 미리 흡수했더라면 DTI나 LTV까지 머리를 싸매고 공부할 필요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현상이 사회 발전을 위한 산통(産痛)인지, 혼란으로 가는 징조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공부를 심하게 권하는 사회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남들은 다 아는데 나 혼자 모르는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하다. 그나마 리더십이라도 제대로 남아 있다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 박사의 거짓말로 인해 전문가의 말조차 믿기 어렵게 됐다. 부동산 하나만 봐도 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더 이상 믿을 게 없으니 오늘도 열심히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린다. 인터넷 검색사이트가 우리나라만큼 장사가 되는 곳도 없을 것이다.

옛말에 백성이 뭘 좀 잘 몰라야 좋은 시절이 온다고 했다. 태평성대는 굳이 세상일에 신경 쓰지 않고 제 일만 묵묵히 해도 배부르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시대를 이름한다. 중국 사기에는 약법삼장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유방이 진나라를 평정한 뒤 단 3개의 법률만 남기고 모든 법을 폐지했다. 살인이나 남을 때리거나 도둑질하는 세 가지 죄만 다스렸다. 그래도 세상이 편안해지더라는 이야기다. 아무리 아는 게 힘이라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다. 뭘 좀 몰라도 편안한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끝 모르고 질주하는 이 덧없는 공부가 힘들고 피곤할 뿐이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