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 꺾인 권오승 위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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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자총액제한제도에 대한 정부의 최종안이 공정거래위원회의 당초 안보다 완화됐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정부 최종안을 더 완화하겠다는 입장이다.

권오승(사진) 공정위원장과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은 14일 오전 출총제 개편안과 관련한 장관회의에서 대기업집단의 환상형 순환출자 금지 제도는 도입하지 않되 순환출자와 관련한 사후 공시를 강화하기로 했다. 또 대기업집단에 대한 출자총액제한은 없애는 대신 대기업집단 내 중핵 계열사(자산 2조원 이상 회사)들의 출자총액만 제한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날 이 같은 내용의 단일안을 만들어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재계는 중핵 계열사 규제는 대기업집단 자체에 대한 규제와 별 차이가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배석자 없이 장관들만 참석해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공정위와 재경부의 입장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전했다. 이 관계자는 15일 부동산대책과 관련한 당정협의가 끝난 오후 1시쯤 출총제 관련 당정협의를 곧바로 진행한 뒤 최종안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 대기업집단과 총수를 공공연하게 겨냥해 '순환출자 금지'라는 고집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던 권 위원장의 고집은 결국 꺾이고 말았다. 권 위원장은 8일 새로운 환상형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출총제는 적용 대상만 줄여 유지한다는 방안을 공개했으나 재계로부터 '이중 족쇄'라는 반발을 샀었다.

이날 회의를 마친 뒤 정세균 장관은 "다 잘됐다"고 말해 '기업 부담을 완화하라'는 재경부와 산자부 입장이 많이 반영됐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공정위는 대통령 보고까지 끝내고서도 정부안을 공식 발표하지 않았다. 김병배 공정위 부위원장은 "당정협의가 아직 남아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발을 뺐다. 여당과의 협의 과정에서 내용이 바뀔 수도 있다는 취지다.

현재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조건 없이 출총제를 폐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요구를 수용하면 정부안은 더 완화될 수밖에 없다. 애써 부처 간 타협을 이뤘지만 공정위는 여전히 코너에 몰려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권 위원장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이다. '순환출자 금지'라는 권 위원장의 소신이 시장과 관련 부처의 뭇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관직 경험이 없는 그가'학자적 소신'을 무리하게 밀어붙인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그는 올 3월 취임할 때만 해도 "대기업 지배구조 대신 독과점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선언해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다가 8월부터 출총제 후속안 논의가 본격화하자 그는 "순환출자가 재벌 총수의 사익 추구와 대그룹의 지배력 남용에 이용된다"며 대기업 규제로 확 돌아섰다.

권 위원장은 하지만 재계와 관련 부처의 집중적인 반발을 꺾지 못하고 순환출자 금지 카드를 접었다. 그는 대세의 흐름을 이미 직감한 듯 13일 간부회의에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 주어진 길을 가겠다'는 내용의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줄줄 읽으며 착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김준술 기자

◆ 출자총액제한제도=자산 6조원을 넘는 대기업집단 계열사들이 순자산의 25%를 넘겨 다른 회사 주식을 갖지 못하게 막는 것. 대그룹이 몸집을 무분별하게 불리는 것을 막겠다며 1986년 도입했으나 외환외기 직후 한때 폐지되기도 했다.

◆ 환상형 순환출자='A기업→B기업→C기업→A기업'과 같이 원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출자. 공정위는 대기업집단 지배주주가 이를 통해 적은 지분으로 계열사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며 이를 금지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재계는 외환위기 이후 부채비율 축소 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순환출자를 했으며, 이를 당장 없애라고 하면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고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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