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5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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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3부 남로당의 궤멸/전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인민군내에 반김세력 확산/전쟁책임 안지려 군관학교 교관들 대거 숙청
인민군의 퇴각은 너무나 무질서했다. 엄격한 규율에 묶여있던 군대조직이 한번 무너지니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밤이 되면 군대들이 동네 민가를 다 점령해 집주인을 헛간으로 몰아내고 자기들이 방을 차지하며 문간에 보초를 세워 피난민들이 얼어죽어도 집안에 넣어주지 않았다.
우리 부대는 취침당번을 정해 밤에 잘 집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방안에 잘 생각은 하지도 않고 문도 없는 부엌과 헛간에 수수대를 깔고 덮고 잤다. 하루는 잘 집을 구하지 못해 밤중까지 행군하고 있었다.
상당히 큰 마을을 발견했었다. 취침당번이 앞을 달려 갔었다. 잘 집을 구하러 앞으로 나갔던 취침당번이 돌아와 침을 뱉으며 『죽일 놈들! 방마다 인민군들이 피난민 여자들을 끼고 누워있어』하는 것이었다.
인민군이 패주하는 북한천지는 인민공화국도 아니고 무질서와 추위와 굶주림의 지옥이었다. 산길을 걸어가는데 한복을 입은 40∼50대의 남자들이 뒤통수에 총을 맞아 개구리처럼 납작납작 길바닥에 엎드려 죽어 있었다. 그 곳은 아직 유엔군이 들어오지도 않은 곳이었다.
나는 이것을 옆을 지나가는 북한사람에게 물어봤다.
『북조선 민주당원과 청우당원들입네다. 미군이 들어오면 다 미군에 붙을 것이라고 미리 숙청한 것입네다』하는 것이었다.
10월 하순이 되니 날은 꽤 추웠다.
우리는 마침 경기도와 황해도 접경지대에서 인민군이 벗어내버린 인민군 동복을 주워입었기 때문에 헛간에서 자도 동사는 면할 수 있었다. 나는 외투만 하나 주워입고 있었다.
밤에 도적이 심해 잘 때에는 외투도 입은 채 총도 벽에 세워놓지 못하고 가슴에 안고 자야 했다.
하루는 우리 부대가 모처럼 방안에서 자게 되었다. 총을 도적맞지 않기 위해 문간에 보초를 세웠었다. 밤중에 보초가 나에게 와서 인민군 군관 세명이 와서 집안에 좀 넣어달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인민군대들에게 푸대접 받은 감정을 참고 내방에 넣어 주었다. 중성하나(소령)를 단 군관이 앞에 서서 들어오며 『야! 남반부 빨치산 대장동무! 대단히 감사하오. 인민군대 보초 같았으면 쫓겨났을 건데 동무 덕택으로 살았소』하며 피가 밴 종이뭉치를 내놓는 것이었다. 오늘 낮에 소를 한마리 잡아 먹고 저녁에 먹으려고 가져왔수다』하며 내앞에 주저앉았다.
같이 고기를 구워먹으며 「공산주의와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이 전쟁의 책임은 김일성이 전부 지고 물러서야 한다』고 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수상이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최고 요직을 독점하고 자기 멋대로 전쟁을 도발한 책임을 김일성이 지지않고 누가 지겠는가.』
그는 『만경대 군관학교나 군사 아카데미에서도 인민군 전통문제에 대해 의문을 가진 교관과 학생들이 상당히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야! 인민군대 안에도 김일성에게 맹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인민군대안에 이러한 반김일성 세력이 있는 것 만큼 당과 정부안에는 더 많은 반김일성세력이 퍼져 나갔다.
김일성은 자기가 전쟁책임을 지지않고 살아 남기 위해 항미원조의 이름으로 백만의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중공군의 팽덕회와 손을 잡아 우선 51년부터 만경대 군관학교와 군사아카데미(육군대학)의 교관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그 다음에는 김일성의 독재를 견제하려는 소련파의 허가이를 암살했다.
또 53년부터는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원의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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