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가 기다려진다/이헌재(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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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90년 10월3일. 우리에게는 추석날이자 단기 4323년에 이르는 개벽의 개천절이었던 이날에 서독과 동독은 통일을 이룩했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동서독의 통합이었지만 세계적인 변화의 물결을 타고 기민하게,그리고 주체적으로 움직임으로써 민족통일로 결론을 보았다. 이처럼 뜻깊은 날로 이어지는 일련의 통일과정을 지켜보는 우리로서는 어딘지 모르게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최근에 와서 「북방정책」이라 하여 소련과의 수교를 서둘러댔고,중국과는 아시안게임을 기점으로 양국간에 무역사무소를 설치키로 했다.
○동북아국 개혁 소극적
북한과도 총리급의 회담을 재개하면서 남북한 축구교환경기로 분단 이후 막혔던 스포츠교류의 숨통을 트는 등 변화를 일으키기에 분주했다. 그러나 어딘지 전반적인 연출이 마치 무대위에 선 연극배우의 과장된 몸짓을 보는 것처럼 생경하고 낯설기가 짝이 없다.
여기에는 단일민족의 내재된 변화의 기틀 내지는 욕구를 긍정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민족적 에너지를 집약하려는 본질적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 첫째는 외부로부터의 변화가 몰고오는 압력에 마지못해 따라가는 듯한 수동적 자세가 강하게 느껴지는 데다가,둘째로 북방정책과 통일정책의 추진을 기득권층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권창출적 차원에서 이끌어가고 있다는 인상때문이다.
21세기를 꼭 10년 앞둔 지금,바야흐로 지구상의 모든 국가와 사회가 변신과 변혁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것은 비단 소련과 동구권 등 공산주의 체제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익적 권위주의가 판을 치던 남미대륙과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남아프리카의 지역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게 벌어지고 있다.
이렇듯 세계를 감싸는 변혁과 개혁은 한마디로 고착화된 관료주의적 이념에서 벗어나고,제도화된 기득집단의 독점적 지배라는 횡포에서 탈피하여 종교와 정치적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려는 보다 인간적이고,보다 합리적이고,보다 형평해지려고 하는 움직임이다.
그런 한편에선 지구의 한쪽 동북아 국가들간에는 이미 대세를 이루고 있는 역사적 변화의 큰 물결을 거부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지못해 소극적인 자세로 표면적인 수용만 함으로써 구질서의 기득권을 고집하는 세력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특정지역에 집중해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흥미를 끌기도 하지만,달리보면 단순한 아쉬움의 차원을 넘어 왠지 모르게 불안감과 우려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중국이라는 나라는 장정세대가 여전히 모든 기득권을 움켜쥐고 있다. 북경아시안게임의 개최가 개혁과 개방의 전기를 마련하려는 상징처럼 보여지지만 내면의 질서체계에 있어서는 절대 공산당에 의한 지배나 우위체계를 포기하려는 것으로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도입하는가 싶지만 한편에선 관료적 레드 테이프가 더 깊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의 매스컴을 경악케 했던 천안문사태의 참상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에는 정반대의 반동력이 숨겨져 있음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G­5의 일원으로 세계경제질서를 좌우하면서 선지자본주의 국가임을 자칭하는 일본도 구질서의 지배는 예외가 아니다.
○북한 경제타개 제스처
신세대의 등단과 서비스부문으로의 경제적 주도권 이양을 거부하는 일본의 정계와 재계는 아직도 철저하게 제조업 중심으로 틀이 박힌 구세대가 지배하고 있다. 일본 경제는 인력부족으로 특징지워진다. 제조업에의 고집은 로봇과 자동화로 고임금에 맞서려하고 있으며,세계가 경제블록화로 협력적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일본은 같은 지역권의 후발국가들에 조차 필요한 제조업의 기술이전을 거부하고 있다.
그 결과 선진국간에는 무역마찰을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 구질서가 변화를 내다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이 갈려 있는 한반도에도 비슷한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김일성 부자와 그 측근의 세력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구세대는 외부의 영향력을 회피하려는 안간힘이 역력하다. 최근에 전개되고 있는 일본과의 접촉은 결코 기존질서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당장의 경제적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
남북대화에 나서는 것도 진정으로 변화라는 당위성을 받아들이려고 의도하는 것인지 아닌지 그 진위가 의심스러우리만큼 나서는 자세가 심히 형식적이다.
우리에게는 5ㆍ16 이후에 30년간을 버텨온 개발엘리트들의 경제적 지배체제가 여전히 뿌리깊으며,그 장기고착화는 사회전반에 걸쳐 제도화로 발을 내리고 있다. 도덕적 기반이 부족한 정치질서에 결부되어 당장당장의 성과달성에 집착함으로써 역시 변화에 대한 대응능력이 한계에 달해 있다.
북경아시안게임에 즈음하여 남북한 단일팀 구성과,적어도 공동응원단의 결성을 제법 소리높여 왔지만 막상 남북대결에 들어가면 언제나 북한을 짓누르는 듯한 남한측의 승리구가로 우월의식을 강조해 댐으로써 여전히 2분법적인 의식구조의 한 단면을 드러내곤 한다. 사상적 기틀이라는 것이 하도 공고해 흑백논리는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리지 않을 듯 하다.
○기득권자의 변신 필요
정계의 의식구조도 크게 다르지 않아 여권이건 야권이건간에 민주주의의 헌정이 명기한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다 시피하는 카리스마적 권위주의 질서가 판을 치고 있다. 외부의 변화압력은 날로 커져가고 있다. 이에 맞서 거부반응을 크게 하다보면 욕구불만의 세력으로 내부의 긴장도도 따라 커지게 마련이다. 결국 한계점에서는 혁변의 소용돌이라는 사회적 희생을 치를 수 밖에 없게 된다. 불행히도 동북아지역이 이러한 수준의 개연성을 높여가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생산조직의 중심이 태평양을 건너와 동북아지역으로 집중되고 있다.
세계사의 중심역할을 해야 할 현실이 한발씩 다가오고 있다. 과연 동북아지역은 21세기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주도해 갈 능력이 있는가. 이땅의 기성지도세력은 환골탈태의 자기변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몇년간을 보아서는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이를 대신할 신세력이 필요한데,새로운 사고와 기치관을 지닌 적극적인 실천의지로 굳게 무장해 기존의 이익집단에 구애되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역사의 전면에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신세대가 기다려진다.<한국신용평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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