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수교 지나친 양보 안된다/이상우 서강대교수ㆍ정치학(논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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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과 소련간의 국교수립이 거의 확정된 모양이다. 잘 된 일이다. 노일전쟁으로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간의 국교가 끊어진지 86년만에 다시 국교를 회복하는 셈이다.
○86년만에 국교회복
국내사회와 달리 질서를 잡아주는 권위체가 따로 없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호선린이 필수적이다. 특히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의 경우에는 강한 적을 주변에 두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과 수교한다는 것은 위험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기 때문에 안보를 생각할 때 모두 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
북한의 군사동맹국인 소련과 국교를 맺는다는 것은 통일환경개선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남북한관계개선의 첫번째 걸림돌은 북한의 고집스러운 현실외면이다. 1백43개의 나라들이 인정하고 있는 한국의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남조선해방」을 고집하고 있는 북한 당국자들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는데 도움을 줄것이기 때문에 소련과의 수교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와 중국이 수교하고 현재 급속히 진행되는 북한과 일본의 관계개선작업이 매듭지어지게 되면 우리가 북한과 더불어 진지하게 통일문제를 논의할 분위기가 조성된다. 교차승인이 분단영구화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통일을 촉진한다는 것은 이미 독일이 입증해주지 않았는가.
한소수교는 두나라사이의 경제협력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기업이 앞장서서 추진하고 있는 경제협력에 정부간의 협조체제가 보태지면 그 진행이 더 촉진될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번의 수교는 잘된 일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거역못할 역사흐름
이번의 수교과정을 지켜보면서 새삼스럽게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역사에는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을 바로타면 번창하고 흐름을 거스르면 자멸한다. 수많은 왕조의 흥망은 역사흐름의 무서움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지금도 역사는 흐르고,그 흐름속에서 반공국가인 한국과 공산종주국인 소련과의 국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련의 스탈린체제는 실패했다. 소련지도자들이 이를 인정했다. 교조적인 이념,시대착오적인 「증오의 철학」의 포로로 남아있는 한 새로운 화해시대,공존공영의 새로운 국제질서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소련지도자들은 깨달았다. 소련은 새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 이념을 초월하여 한국과의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소련은 한국의 투자를 원하고 있다.
한국의 앞선 기업관리능력을 도입하려 하고 있다. 한국을 앞장세워 아시아­태평양 협력체제에 발을 들여 놓으려 하고 있다. 나아가 서부태평양지역에서의 미국의 독점적 지배를 견제하여 자국 안보에 보탬을 주려하고 있다. 이러한 구상속에서 소련은 한국과의 수교를 결정한 것이다.
한국은 소련의 협조를 바라고 있다. 가까이로는 유엔가입신청때 소련이 거부권 행사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북한의 무력통일기도를 부채질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멀리로는 동북아에서 어느 한나라가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데 소련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길이기 때문이다.
○의연하게 대처해야
결국 소련도 한국을 필요로 하고 한국도 소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두나라의 수교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냉철하게 사태를 분석해보면 소련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것이 우리가 소련을 필요로 하는 것 보다 더 긴박하다. 세계정세의 흐름을 보면 소련은 수교하기 전에라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유엔가입문제도,그리고 북한지원문제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싼 대가를 물고 수교를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다.
보도에 의하면 우리는 수교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는 것 같다. 경제협력자금 몇십억달러도 문제려니와 두고두고 손실을 끼칠 항공협정도 그러하다. 9월12일부터 사흘간 모스크바에서 열린 양국 항공회담에서 소련측이 내놓은 협정안을 보면 지난 30년간 우리가 시달려온 한미항공협정의 재판을 보는 것 같다.
불평등조약의 대표처럼 여겨오던 한미항공협정은 우리가 미국에 매어 지낼 때 강요받은 것이었으나 이제 또다시 소련에 이런 양보를 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소련항공사는 유럽 모든 지점을 떠나 소련 모든 지점을 거쳐 동남아ㆍ호주까지 마음대로 운항하고 한국 항공사는 소련내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만 갈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연말전에 수교를 이루어 우리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되면 정부의 업적으로 칭송받게 되고,또한 대통령의 위신도 올라갈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인 몇가지 이익을 앞세워 두고두고 우리가 손실을 감수해야할 일들을 양보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본말을 뒤집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소수교,한중관계개선등에서 우리정부가 너무 서둔다는 질책이 사회구석구석에서 일고 있다. 정부가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전문가들에게 물어야 한다. 전문가들의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참고하면 실수를 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정을 잘 알면서도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익을 희생한다면 그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이런 오해를 받게 되면 정부의 신임은 모두 깨지게 된다. 그것은 정치위기로 이어지는 불상사가 아니겠는가.
한소수교와 한중수교는 우리가 보챈다고 될일이 아니다. 되게 될때가 되면 되는 것이다. 서둘면 그만큼 손해본다.
북방정책을 포함한 대외정책과 대북한정책은 민족의 사활에 관련되는 중대사다. 어떤 경우도 정치적 이해가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신중히,그리고 의연하게 다루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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