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의 한국인 세계를 노린다"|미 버클리대 화학과 교수 김성호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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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국인 과학자 중에서 최초로 노벨상 (의학 및 생리학상 또는 화학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과연 누가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미국 버클리대 화학과의 김성호 교수 (52)를 꼽는 사람이 많다.
본인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세계 생화학계에서 이 같은 얘기가 회자되는 이유는 김 교수가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는 일련의 연구들이 현재 인류 건강의 최대공적인 암을 퇴치할 수 있는 실마리를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북부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작년 10월 대지진으로 무너졌던 베이브리지를 건너가면 곧바로 만나는 캘리포니아주립 버클리대. 세계적인 명문답게 고색 창연한 분위기의 대학건물들 중에서도 원형의 특이한 구조로 지어진 엘빈 캘빈랩이 김 박사의 연구 등이다.
이 대학 유일의 한국인 정교수인 동시에 이 연구 등의 1백여 고급 두뇌를 지휘 총괄하는 로렌스버클리 국립 연구소 화학생체역학 연구부장이기도한 김 박사가 이룬 최근의 업적은 발암 유전자의 입체구조를 밝힘으로써 암 치료는 물론 예방을 위한 단서를 풀기 시작했다는 것. 『인체 세포 속에는 Ras 단백질이라는 물질이 있는데 이 단백질은 세포의 정상 분열과 성장, 그리고 일정한 단계에서 성장을 멈추게 하는 등 기능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이 단백질이 어떤 이유로 손상을 받거나 훼손될 경우 세포가 무한분열 하면서 암으로 진전되죠』
이는 특히 췌장암·대장암·폐암 등의 주요인으로 김 박사는 87년 바로 이 Ras단백질의 입체 구조를 X선 편광 컴퓨터 분석 기법을 써 처음 밝혀내 암의 기초적인 발병기전을 알아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함으로써 관련 학계의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이 연구의 진전으로 암을 일으키는 단백질의 변형이나 손상 사태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는 응용 연구가 관련 분야에서 활발히 진행 중에 있다.
특히 올해 초에는 Ras 단백질이 스위치가 켜져 있을 때, 즉 활동을 하고 있을 때와 스위치가 꺼져 있을 때 (활동을 멈췄을 때) 분자 구조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까지 밝혀내 발암기전 연구에 한걸음 성큼 다가서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같은 업적 때문에 김 박사는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인 학술 대회가 개최될 때마다 단골 초청 연사로 지목돼 9월초에도 일본을 다녀왔을 정도다.
지난 73년 이미 유전 정보 전달체인 t-RNA의 입체 구조를 규명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김 박사가 최근에 새롭게 시작한 분야는 「리셉터」의 실체 규명.
모든 생명체는 어떤 물질 또는 자극에 대한 반응을 하게돼 있는데, 이것이 생체내의 「리셉터」에 의해 전해진다는 것.
예컨대 인체 내에 당분이 증가하면 당분을 감지하는 리셉터가 이 정보를 췌장으로 전달해 인슐린 호르몬을 분비시킴으로써 당분 분해를 왕성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리셉터의 실체를 알아내면 당뇨법의 원인치료가 가능하며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착상이다.
김 박사가 생체의 기초적인 신비를 푸는데 몰두하기 시작한 연유는 서울대 문리대 (60년)와 대학원 (62)을 졸업한 후 피츠버그대와 MIT에서 생화학 분야를 연구하면서부터.
당시 보스턴대에서 역시 분자 생물학 박사 과정에 있던 중국계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 부인 로잘린 유안 박사 (45) 역시 현재 로렌스버클리 연구소 연구원으로 그의 충실한 연구 동반자이기도 하다.
『생명의 신비를 푸는 자신의 직업이 인류 건강의 초석으로 쓰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는 경양을 보이기도 하는 김 교수는 『연구의 진전이 순조롭거나 의외로 안 풀릴 경우 젊은 연구원들과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평소 두 아들과 함께 스노클 (간단한 호흡 장비만으로 수중에서 하는 운동)·사이클링·등반·수영 등 격렬한 운동으로 체력 유지를 한다고 설명한다.
낮 12시부터 장장 두시간에 걸쳐 버클리대학내 교수 등 암 연구진 1백여명을 대상으로 「Ras 단백질의 분자 스위치=3차원적 개념과 기능적 관련성」에 대한 특강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우고 또다시 연구 구상을 시작하는 김 교수.
외모에 신경 쓰는 시간조차 낭비 같아서 수염을 기른다는 그의 소탈한 모습에서 「작은 거인」의 체취가 느껴진다. 【버클리=윤재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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