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새댁은 똑순이 부녀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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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출신 부녀회장 오진주(22·맨 왼쪽)씨가 이웃 주민의 참깨 수확을 도운 뒤 어깨를 주물러 주고 있다. 맨 오른쪽은 오씨의 남편 김정기(39). [옥천=김성태 프리랜서]

3일 오전 11시 충북 옥천군 청성면 산남리 들녘. 참깨를 수확하고 있는 유일선(68)씨 부부에게 도우미가 찾아왔다. 마을 부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오진주(22)씨. 베트남 출신인 그는 3년 전 이 마을 김정기(39)씨와 결혼했다. 성격이 활달하고 마을에서 가장 젊다는 이유로 올 1월 만장일치로 부녀회장에 선출됐다. 오씨는 유씨 부부에게 "어르신들 도와드릴 거 없나요"라며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씨가 "도와주면 좋지만 미안해서…"라고 말하기 무섭게 오씨는 방망이로 '툭툭' 쳐서 참깨를 털었다. 수확이 끝나자 노인들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말벗이 됐다.

그는 "주민 대부분이 50대 이상 노년층이어서 일손이 부족해 아우성"이라며 "젊은 부녀회장이 모른 체할 수 없어 틈틈이 이웃을 도와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마을은 57가구, 113명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산골마을이다.

오씨의 본래 이름은 '응우옌테이 럽벗비취'였다. 한국 이름은 남편의 선배가 이름 끝자가 보석 이름과 같다며 '진주'라고 짓고 성씨는 감탄사 '오~'에서 따왔다고 한다.

농촌에 외국인 부녀회장이나 이장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농촌총각들의 국제결혼이 늘어난 데다 농촌에 젊은 사람이 부족한 데 따른 현상이다. 원광대 채옥희(가정복지) 교수는 "우리 사회가 열린 민족주의, 열린사회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 농촌에 새로운 활력소=전북 김제시 용지면 효정마을의 마쓰나 가쓰코(34.일본인)씨도 3년 전부터 부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3년 전 결혼해 남편과 함께 농사 50여 마지기를 짓는 그는 격월로 부녀회를 개최하고 봄.가을 경로잔치를 열기도 한다. 주민들은 "시부모를 잘 모시면서 동네 일을 똑부러지게 본다"고 칭찬했다. 전북 익산시 성당면 내갈마을 주부이장 박원복(38)씨는 옌지(延吉) 출신의 중국동포다.

외국인 여성들의 부녀회장 취임은 올 들어 두드러졌다. 85가구 3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둔일리에서는 오가와 데루요(45.일본인)씨가 1월부터 부녀회를 이끌고 있다. 전남 해남군 옥천면 흑천마을의 주민들은 2월 일본인 소메야 유코(38)씨를 부녀회장으로 추대했다.

전종석 익산시 성당면장은 "젊은 외국인 주부들이 마을을 위해 일하는 것에 대해 주민들도 '잘 도와주자'는 분위기"라며 "이들의 활동이 농촌마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외국인 부녀회장들은 문화적 차이에 따른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중국동포 주부이장 박원복씨는 "면내 이장 24명 중 홍일점이라 회식 때 소외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일본인 부녀회장인 오가와씨는"한국어가 서툴러 의사소통이 잘 안 돼 애를 먹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 "농촌 경제활동의 주요 세력"=국제결혼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 여성은 2001년 1만6명에서 지난해 말 현재 3만1180명으로 5년 새 세 배가량 늘었다. 전북 장수군 민들레 국제결혼 이민자가족 자원센터 이현선(43)소장은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인 여성들은 경제활동 인구의 주요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농촌의 중심 역할을 하는 지역 리더나 원어민 강사 등으로 활용하기 위한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주.옥천=장대석.김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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