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주주 쉽게 보면 사냥감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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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기업 사냥꾼'에서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주주행동주의자'로-.

헤지펀드들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삼아 기업사냥에 나서고 있다. 헤지펀드들은 특히 아시아 시장에서 직접 주식 투자 대신 지배구조를 빌미로 경영진과 이사회를 압박, 단기 차익이나 배당수익을 올리는 '주주행동주의' 방식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의 KT&G 공격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엔 세계 4대 헤지펀드의 하나인 파랄론 캐피털 매니지먼트가 경영참가를 목적으로 영원무역 지분 8.15%를 확보하기도 했다. 아직 겉으로 드러난 '기업사냥' 사례는 많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주가 급락이나 경영권 변동 등 호기가 생기면 언제라도 헤지펀드의 국내 기업 공격이 거세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에서는 이런 '신종 기업사냥'에 대비하기 위해 주주 명부를 확인하고 위임장 대결이 벌어졌을 때 우호지분을 확보하는 대행 업체들이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그 가운데 아이칸과의 대결에서 KT&G의 위임장 대결을 대행했던 '조지슨 셰어홀더 서비스'(이하 조지슨)의 브루스 골드파브(사진) 전무를 17일(현지 시간) 미 뉴욕 골드만삭스 본사에서 만났다.

"당장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험에 처하지 않더라도 형식적인 주총은 줄고 경영권에 영향을 미칠 의사결정을 하는 주총 비율은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주주들의 속내를 파악하는 게 중요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간접투자가 늘면서 명부상 주주가 아니라 진짜 주주가 누구인지 파악하기는 더욱 어려워져 기업들이 곤란을 겪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한 투자회사에서 한국 관련 펀드 매니저로 활동하다 6년 전 조지슨에 합류했다는 골드파브 전무는 "(한국 기업의 경우) 외국인 지분이 많은 기업일수록 평소 외국인 투자자들의 성향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지만 이를 소홀히 하다 '기업사냥'의 먹잇감이 된다"며 "일분일초가 아쉬운 경영권 다툼 와중에 주요 주주들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허둥대다 허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지배구조가 좋은지 나쁜지는 기업이 처한 환경에 따라 모두 다르다"며 "정해진 모범 지배구조가 있기보다는 평소 주주들에게 이런 지배구조를 취하는 게 주주가치를 높이는 데 좋다는 메시지를 평소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주주행동주의자들의 공격이 있든 없든 주주들과의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이 경영권 방어에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아이칸의 공격 이후에 KT&G가 해외 IR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이같은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골드파브 전무는 이런 필요성 때문에 미국에서는 '먹잇감'이 되기 전에 먼저 조지슨 같은 업체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상장사 2만5000여 개 가운데 4000여 개 회사가 대행업체의 위임장 변호사를 고용해 진짜 주주를 확인하고 과거 비슷한 상황에서의 투표 성향을 미리 파악해둔다는 것이다. 미국 내에는 이런 대행업체가 모두 5개 있으며, 조지슨은 미국 내에서 1000여 개의 회사를 고객으로 둔 메이저 업체다. 미국 이외에도 KT&G를 포함, 아시아와 유럽에서도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그는 "위임장 대결 국면에 접어들면 '사냥꾼'이나 '먹잇감' 모두 우리를 찾아온다"며 "주로 '먹잇감'의 입장을 많이 대변하고 있고 의뢰를 받으면 공시 등 공개된 자료를 통해 길어도 2주 이내에 진짜 주주명부를 확보한 후 행동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뉴욕=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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