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식히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자연이 그 생명력용 한껏 분출하는 계절 여름·빛과 소리가 더없이 풍요하다. 튀는 물방울 같은 산등성이 솔바람 같은 시심과 작의가 있다. 이 여름 시인과 화가를 초대, 「여름 시화」를 꾸민다. 【편집자 주】

<여름 안방>몸 시·23회|정진규
이 여름엔
가짜 냄새가 좀 나는게 더 좋다
쉰 내가 좀 나는게 더 좋다
나는 산이나 바다로 가지 않겠다
내리는 빗소리나 혼자 듣겠다
산으로 가거나 바다로 가면 나는 막힌다
산이나 바다에선 진짜 냄새만 나기 때문이다
나는 가짜 냄새가 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쉰 내가 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짜에겐 가까이 들어가 앉을 빈자리가 있지만
진짜는 진짜로만 꽉 차 있다 빈자리가 없다
틈이 없다
무릎을 꿇으라 한다
파도를 보아라
싸악 지워버린다 또다시 지워버린다 싸악!
내가 없다
모두 지워져 가지고 돌아올 사람들을 기다린다
나는 산이나 바다로 가지 않겠다
산이나 바다로 간 사람들을
텅 빈 도시에 남아 기다린다
이 여름 몇 마리 개들과 함께 기다린다
지워진 몸들을 기다린다
몸이 없는 몸들을 기다린다
당분간은,
사람이 만든 것은 모두! 가짜라고
더욱 믿게 될
애기도 낳지 않을,
애기도 낳지 않을,
들어가 앉을 곳이 없음을 기다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