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입시장' 된 명문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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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인 지난 25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경기고. 방과후였지만 교문은 학교에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고급 승용차들이 꼬리를 물었고 미니버스가 부지런히 학생들을 실어날랐다. 학부모들은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자녀들에게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다. 초조한 모습으로 합장을 하며 기도하는 학부모의 모습은 대학 입시장을 연상케 했다.

강남 J학원이 실시한 '예비 고1(중3) 학력지수평가.선발고사' 현장. 말로만 학력지수 평가지, 사실상 중3 학생을 대상으로 영어.수학 시험을 보게 해 우수한 학원생을 선발하기 위한 '학원 입시장'이었다.

J학원은 최근 명문대 진학률이 높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최상위권 학생들이 몰리는 바람에 학원 측은 선발고사를 치러 고교 예비생을 가려 뽑고 있다. 시험에 떨어질 경우 6개월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인기다.

시험장에 딸을 들여보내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崔모(45.여)씨는 "대입 수능만큼은 아니지만 무척 긴장된다"며 "사교육에 이렇게까지 매달린다는 게 기분이 찜찜하지만 공교육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 아니냐"고 말했다.

또 다른 학부모 朴모(42.여)씨는 "강남학군 학교에 다닌다 하더라도 성적이 고만고만한 애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보다는 일류 학원에서 우수한 학생들과 경쟁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1백50명을 뽑는 이날 시험에 5백여명의 학생들이 시험을 봤다. 이들은 모두 전교에서 10등 안에 드는 우수생들. 강북 학생들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강북의 C중 3학년 아들을 둔 李모(41.여)씨는 "강남 애들에게 뒤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어 강남 학원을 찾은 것"이라고 전했다.

학원 관계자는 "응시생 중 강북 학생의 비율이 30% 정도지만 합격자 비율은 20%도 안 된다"며 "강남북 간 학력차를 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공교육 기관이 사설 입시학원에 시험장을 내준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일부 교사.학부모 사이에선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전교조 성원재 대변인은 "공교육의 권위가 아무리 무너졌지만 학교 시설을 사설학원 입시를 위해 빌려주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한다"며 "사교육에 밀려난 공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밝혔다.

강북의 한 고등학교 교사(52.여)도 "전통의 명문고라는 경기고마저 자존심을 저버린 일 같아 교사로서 자괴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학원 관계자는 "당초 학원에서 시험을 실시하려 했는데 지원자가 넘쳐 지난주 부랴부랴 외부 시험장을 구했다"고 밝혔다.

경기고 관계자는 "학사 일정에 차질이 없고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는 한 시설을 외부에 빌려주는 게 학교 방침"이라며 "다만 단순히 중3 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력평가인 줄만 알았고 학원입시인 줄은 몰랐다"고 해명했다. 학원 측은 학교 측에 전기사용료 등 실비만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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