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뒤덮은 드골 추모열기/50년전 대독 항전 호소육성 종일 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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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독자외교ㆍ전격퇴진에 국민존경 여전
18일 파리는 드골 추모열기로 달아있었다. 프랑스가 나치독일에 함락된 직후인 1940년 6월18일 영국 BBC방송을 통해 드골이 구국을 호소한지 50년째가 되는 이날 파리에서는 수십만 인파가 참가한 갖가지 기념행사가 시내 곳곳에서 벌어졌다.
드골의 생전 모습이 담긴 대형포스터가 파리시내를 뒤덮은 가운데 시내중심부 콩코르드광장에 설치된 초대형스피커에서는 대독항전을 호소하는 드골의 육성이 하루종일 울려퍼졌다. 센강에서는 2백여척의 모터보트가 동원된 수상기념제가 장대하게 벌어졌다.
특히 올해는 드골 탄생 1백주년이고,그가 죽은지 2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해 기념행사는 프랑스사람들에게 더욱 뜻깊은 것이었다.
런던의 BBC 스튜디오에서 레지스탕스를 호소하던 당시 그는 패전국의 이름없는 일개 초급장성(준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프랑스 패배는 일시적이며,레지스탕스의 불꽃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호소는 꺼져가던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에 불을 붙였고,2차대전기간중 프랑스가 당당하게 연합국의 일원으로 행세할 수 있게한 발판이 됐다.
그는 그후 또한번 위기에 처한 프랑스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8년 알제리독립을 둘러싼 군부내의 반란으로 프랑스가 내란직전의 위기에까지 몰렸을때 구국을 호소하며 재집권,국민투표를 통해 식민주의의 유산을 털어버리는 한편 제5공화국 수립을 통해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한 현대민주국가로 프랑스를 정착시킨 것이다.
이와 함께 국방과 외교를 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규정한 제5공화국헌법을 근거로 그는 일찍이 핵무기개발을 단행,동서냉전의 격동기에서 독자적인 방위전략을 추진했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에 대한 미국의 단독지휘권에 반발,NATO군 통합지휘체제에서 탈퇴를 강행했다.
그런가하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과 맨처음 수교했고 중동전쟁당시 아랍편을 드는 등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그는 미소라는 초강대국에 맞서는 독자성 유지를 위해 애써왔다.
그의 집권과 관련,쿠데타라는 일부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고,또 그의 통치스타일이 카리스마적이고 권위적이었다는 지적도 있기는 하지만 그는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더없이 훌륭한 전통을 남겼다고 프랑스인들은 평가하고 있다.
69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여론이 자신을 떠나있음이 확인되자 바로 다음날 그는 짤막한 성명만을 남긴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콜롱베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그의 통치스타일이 카리스마적이었다는 악평에도 불구,많은 정치가들이 그를 추앙하고 있다.【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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