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남북 군축」신축성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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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북한이 한소정상회담개최 발표직후인 지난달 31일 전격적으로 제안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군축제안」은 그동안 선전용으로 내어 놓았던 과거의 제안보다는 상당히 현실에 접근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우리정부도 이에 대응하는 방안을 여러 각도에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남북한 군축문제가 세계의 이목을 끌고있다.
북한의 새 군축안은 그동안 북한이 고집하던 선병력감축→후신뢰구축의 틀을 버리고 우리가 촉구했던 선신뢰구축→후군비통제라는 단계적 접근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우리측이 그동안 군사정전위나 각급 회담에서 제안한 내용에 어느정도 접근돼 있다.
북한제안의 진심여부를 떠나 군축문제가 성큼 현실문제로 다가섬에 따라 정부도 남북간 군비통제를 위해 범정부차원의 군비통제조정위의 설치를 고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선 북측이 그동안 고집하던 남·북한, 미국의 3자회담방식을 완화하여 한국을 군축협상의 당사자로 설정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즉 북한은 『미국이 아직도 3자회담에응하려 하지 않는 조건에서 그것이 실현될 때까지 무한정 군축문제 토의를 미룰 수 없다』며 『3자회담 이전에라도 가능한 군축문제토의를 진행할 방도를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변화된 입장을 발표했다.
물론 새 제안의 말미에 『미국이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조미회담이나 3자회담에 반드시 나와야 할 것』이라고 토를 달고 있으나 군축안의 전체 내용으로 보아 한국을 직접 당사자로인정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지난 88년의 군축안에서는 물론, 84년부터 줄곧 남·북한, 미국의 3자회담을 주장해왔던 북한이 이번에 자세를 완화한 것은 주목할만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이 86년12월 김일성의 시정연설을 통해 남북정치 군사회담을 열 것을 주장해왔고 88년 군축안에도 이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3자회담」의 틀안이라는전제를 깔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74년1월 박정희대통령이 「남북한 상호불가침협정」안을 내놓자 74년3월부터 자신들이 내놓은 「평화협정」 당사자로 미국을 걸고 들어갔다. 그러나 미국이 직접협상을 계속거부하자 84년1월에 「3자회담」안을 내놓고 주한미군 철수 및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북한은 또 새 군축안에서 전례없이 군사적 신뢰구축을 첫단계로 설정한 「단계론적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새군축안은 「남북신뢰조성→남북무력감축→외국무력철수→군축→평화보장」 이라는 수순을 취하고있다.
88년의 군축안에서는 「단계적인 미군무력의 철수 및 남북간군축」방안과 「남북간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완화」 방안이 병렬적으로 설정됐었으나 역시 내용상은 주한미군철수를 전면에 내걸고 3자회담을 강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88년에 제안한 대결상태 완화방안과 이번 제안의 내용을 비교해 볼 때 군사면에서 좀더 구체적인 조치들이 포함돼 있는 것도 특징이다.
북한은 당시 대결상태완화를 위한 조치로 ▲상호비방중상중지 ▲다방면적 합작과 교류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대규모군사연습 중지 ▲군사분계선일대의 군사행동 중지 ▲쌍방고위군사당국자간의 직통전화 개설등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이번 북측 군축안은 남북신뢰조성을 위해 ▲외국군대와의 합동군사훈련 중지 ▲사단급이상 규모의 군사훈련금지 ▲군사분계선일대에서의 군사연습금지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군사시설물 해체, 비무장지대의 평화적목적 이용 포함) ▲쌍방 고위군사당국자간의 직통전화 설치·운영등을 내놓고있다.
특히 이중 일부는 우리측안과 거의 비슷한 점도 주목할만하다.
북한은 또 군축시기에 대해서도 좀더 유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새 군축안에는 『쌍방의 군측안이 합의된 때로부터 3∼4년간에 3단계로 나눠 실시하자』며 우리측과의 협상을 중시하고 있다.
88년의 군축안에서 91년말까지 3단계로 군축을 단행하자고 일방적으로 주장한 것과 비교해볼때 상당한 변화가 엿보인다.
물론 현실적인 의미는 별로없는 것이지만 병력감축에 대해서도 1단계 30만명, 2단계 20만명, 3단계 10만명 이하등 구체적인 안을 제시해왔다.
병력수 「10만명선 축소」는 새삼스런 제안은 아니다. 54년6월 제네바회담에서 당시 북한외교부장 남일이 주강한 이래 73년 남북조절위원회에서도 10만명수준 감군안을 내놓았다.
북한이 내놓은 병력감축안은 함정이 있는 것으로 우리 군사당국은 분석하고 있다.
정규군만 보유하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북한은 노농적위대등 소년까지도 동원할 수 있는 전시체제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정규군을 줄일 경우 우리에게만 일방적인 전력 약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새 군사기술·장비의 도입및 무장장비개발의 중지를 포함하여 군참모총장급의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군비통제와 남북간에 있을 수 있는 군사상의 분쟁문제등을 협의, 해결하자』고 제의하고 있어 우리측이 사용해온 「군비통제」개념을 북측이 어느정도 수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측의 군축안이 주한미군의 철수시기에 대해 처음으로 기한을 못박지않고 남북한의 단계적 벙력삭감에 보조를 맞추자고 한 점도 주목된다. 일본 요미우리신문(6월7일)에 따르면 미정부관계자들도 이 점을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또 핵문제에 대해 핵무기생산·구입 및 핵무기를 적재한 외국비행기·함선의 한반도영내로의 출입·통과를 금지 또는 제한하자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 입장은 88년의 군축안에는 없었던 내용으로 북한이 미국뿐 아니라 소련까지 겨냥한 제안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즉 불편해진 소·북한관계때문에 소련 함정및 비행기가 북한을 이용하지 못하게한다는 위협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북측의 군축안이 비록 변화됐다고는 하지만 그 목적이 여전히 미국과 평화협정체결에 있고 한국을 그 「협정」의 당사자로 명백히 설정하지않은 점등이 그들의 진의를 의심케 만든다.
북측의 군축안이 전반적으로 과거에 비해 우리측과의 협상 여지를 많이 남겨놓은 것은 사실이다. 이제 우리측이 어떤 군축안을 내놓고 이에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하다.

<유영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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