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전업 주부의 희망' 올브라이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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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매들린 올브라이트. 그가 상원의원 보좌관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서른아홉 살 때였다. 이전의 직장 경력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사진 편집자 조수직이 고작이었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 등을 키워낸 미 명문 웰즐리여대를 나왔다. 하지만 졸업식 사흘 후 결혼한 뒤론 세 딸을 키우며 언론인 남편의 직장을 따라 수차례 이삿짐 보따리를 쌌다. 국제관계학으로 박사학위를 따는 데는 13년이 걸렸다. 쌍둥이 딸이 아기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시작했던 학위 논문은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된 뒤에야 끝났다. 가정과 학문, 사회적 관심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문제는 항상 그를 괴롭혔다.

예순을 눈앞에 둔 1996년 말. 그는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매들린, 국무장관이 되어주오"라는 전화를 받는다. 워싱턴 정가는 충격에 휩싸였다. 얼마 후 그는 미국 역사상 행정부의 가장 고위직에 오른 여성이 됐다. 17년간 주부로 지내던 여성이 뒤늦게 일을 시작해 국무장관까지 오른 것은 한편의 드라마 같다.

아이를 웬만큼 키워 놨으니 내 일을 가져야겠다는 여성들에겐 눈이 번쩍 띌 얘기다. 학창 시절 '한 공부'했던 이라면 더욱 그럴 터다. 전국의 여성회관.여성인력개발센터와 대학 평생교육 프로그램,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는 인생 2막을 준비하기 위해 적성을 찾고 일자리를 구하려는 여성들로 붐빈다. 언감생심! 올브라이트와 견주다니! 하지만 그녀도 주부였을 때 자신이 존경했던 여성들을 감히 따라갈 생각조차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2005년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3.9%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60.1%)과 큰 차이가 난다. 더 큰 문제는 대졸 이상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격차가 훨씬 크다는 점이다. 57.6%라는 수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OECD 국가 평균치(78.1%)나 서구 선진국에 비해 무려 20~30%포인트나 떨어진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1만6000달러였다.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갈 때 발생하는 변화 중 하나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으니 노동력 부족을 메우고 국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대의 자원이 고학력 여성이다.

하지만 정부의 여성 일자리 창출은 하위직.임시직.비정규직에 머물러 있다. 2010년까지 여성 일자리 58만 개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들여다보면 제대로 된 일자리는 별로 없다. 고학력 여성들을 버려두는 것은 인력.자원 낭비다. 병폐도 생긴다. 자신의 에너지와 능력을 자녀 교육에 쏟아붓는 여성들을 주변에서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들에게 적절한 일자리를 주면 우리 교육문제의 절반 정도는 풀 수 있을 것이다.

고학력 여성들이 적성에 맞는 직장을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격증이나 직업훈련뿐 아니라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방법도 가르쳐야 한다. 이곳저곳을 돌면서 교육 쇼핑만 하며 주저하는 이에겐 사회로 나아가도록 용기를 주고 충분한 정보도 제공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차별을 없애고 보육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도 국가가 할 일이다.

경력도 인맥도 없던 시절 올브라이트가 처음 한 일은 자원봉사였다. 동네 학교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 쿠키를 팔고 뉴스레터를 만들었다. 장학기금 캠페인도 이끌었다. 학창 시절 색색의 펜으로 공부를 정리하던 습성을 모금에 발휘했다. 이 일은 그녀의 인생을 진정으로 바꿔놓았다. 지켜본 이들이 상원의원의 기금모금 만찬을 조직해 줄 것을 요구했고, 이 인연으로 보좌관에 발탁됐다.

"삶에서 한 가지 일은 또 다른 일을 부른다. 워싱턴에서 한 사람의 추천은 다른 사람의 추천을 부른다"는 게 올브라이트의 경험이다. 한국의 주부들도 이 말을 출발점으로 삼아 제2의 인생에 도전해 보면 어떨지.

문경란 논설위원 겸 여성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