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세상] 일부 신문 - 방송 극한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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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중.동 이라는 말은 신문사들의 보도와 논조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단어다. 대북 관계.대통령 등에 대한 중앙.조선.동아의 보도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한 묶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이 단어를 폐기할 것을 공식적으로 제안한다."

민언련의 최민희 사무총장이 지난 17일 '대통령과 언론, 갈등의 원인과 대책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세미나 발표에서 제기한 내용이다. 이 단어는 권위주의 세력과 언론들이 '반대 목소리'를 비판하기 위해 보인 '집단몰이'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미디어별 차이점을 인정하고 구체적 분석을 통한 사안별로 미디어를 비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관점이다. 그동안 진보적인 언론시민단체가 보인 한쪽의 입장만을 부각시키는 관점을 털고 미디어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비판 방법론을 여는 반가운 징조라 할 수 있다.

언론계가 반목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시각전환은 의미가 크다. 최근 일부 신문과 방송의 싸움은 극단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KBS를 중심으로 일부 방송인은 '구독 금지'를, 일부 신문은 '시청료 폐지'라는 초강수 카드로 맞붙고 있다. 사회 통합에 앞장서야 할 미디어들이 오히려 정파에 얽매여 사회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킨다는 우려도 나온다.

서구에서도 한때 '푸들 저널리즘'이라 해서 언론이 정치인의 무릎에서 재롱을 부린 애완견의 역할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미디어의 본분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한 이들은 객관 저널리즘.탐사 저널리즘 등으로 방향을 바꾼 지 이미 오래다. 미디어의 존재 정당성은 '팩트'(Facts) 전달과 권력에 대한 감시.비판에 있다.

오늘날 우리 언론 매체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원인은 무엇일까. 당파성 때문만이 아니라 미디어의 기능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거나, 혹은 아직 냉전 이데올로기 망령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은 아닌지.

미국 닉슨 대통령의 불법 도청을 폭로한 '워터게이트 사건'때나 독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비밀문서를 보도했다고 공권력이 잡지사 사무실에 진입한 '슈피겔지 사건' 때 구미 언론은 좌.우, 진보.보수를 떠나 대다수 미디어는 정치 권력과 거리를 두고 비판했다. 미디어와 정치권력은 긴장관계가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선진국 미디어들은 이처럼 쉽게 흥분하지 않는다. 최근 영국 블레어 정권과 공영방송인 BBC가 '이라크 보도'를 두고 한판 싸움이 붙었을 때 다른 미디어는 보수.진보를 떠나 '팩트' 전달에 최선을 다했다. 지금 한국의 미디어들은 어떤가.

대다수 국민은 미디어들의 '정권과 코드 맞추기'와 '색깔 때리기'를 혐오하고 있다. 미디어란 갈등을 치유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커뮤니케이션 기구로도 기능한다. 지금 한국 언론에 주어진 사명은 남북.지역.세대별로 찢겨진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이다. 독일 철학자 훗설(Husserl)이 지적했듯이 우리 언론인은 자신들이 믿는 신념과 가치를 '판단 중지'(epoche)하고 편견.선입감 없이 상대방을 이해한 다음 비판하는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언론인들이 먼저 상호 차이를 인정하고, 소통과 토론을 통해 갈등과 차이를 해소하는 성숙된 모습을 보이길 기대해 본다.

김택환 미디어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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