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군주는 갈등 조정자 "조직 단합 위해 남부터 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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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2'에서 군주(붉은 원 안)가 말을 시작하자 혈맹원들이 "주목" "주목"이라며 복명복창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가난한 부부 혈맹원에게 누구보다 화려한 온라인 결혼식을 올려 주는 것도 군주의 몫이다. 결혼식은 모든 혈맹원들의 축제가 된다.

◆ "군주의 논리, 군주의 윤리"=2005년 봄 '리니지2'에서 혈맹 전쟁이 격화됐을 때의 일이다. 41세의 남자가 작은 혈맹의 군주로 있었다. 반란군에 속해 있던 그의 혈맹은 어느 날 외곽에 고립된 지배혈맹 선봉장의 부대를 기습했다가 계략에 말려 거꾸로 포위되고 말았다. 퇴로가 끊긴 상황. 적군 궁수부대의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고 혈맹원들은 속속 죽어갔다. 그때 남은 혈맹원들이 남자의 앞을 가렸다. 동시에 채팅창에는 다급한 타이핑이 떴다. "군주님 ㅌ ㅌ ㅌ(튀어 튀어 튀어!)"

자기들이 몸으로 화살을 막을 동안 빨리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남자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모니터가 보이지 않았다. 손이 떨려 마우스를 조작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의 캐릭터도 도망치다가 죽임을 당했다.

가상 공간의 주류 장르인 MMORPG(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는 본질적으로 RPG, 즉 역할 놀이(Role Playing Game)다. 역할 놀이는 1930년대 정신과 의사 모레네가 창안했다. 가상으로 설정된 상황에서 특정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기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모방하고 경험하는 일종의 심리극이다.

첫 머리의 에피소드는 디지털 가상공간의 순도 높은 역할 놀이 체험을 보여준다. 사용자는 혈맹의 동료들이 자기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가는 것을 보는 군주의 역할을 경험한 것이다. 물론 그 경험은 현실이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가상이다.

그러나 현실 공간의 체험이 그의 인생이듯 가상공간의 체험도 그의 인생이다. 이런 슬픔과 분함의 처절한 정황은 그가 만난 일생일대의 감정적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의 인생에서 사용자는 한번도 이러한 사랑과 존경과 충성을 받아본 적이 없을 것이다.

사용자는 이런 역할 놀이를 겪으면서 점점 더 진짜 군주처럼 변해간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들을 억제하고 타인을 먼저 배려하게 된다. 군주의 위치에 맞는 온화한 언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한다. 혈맹원들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기에 힘쓴다. 다양한 갈등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팀워크를 이루려고 노력한다.

가상공간은 우열과 승패에 자기 책임의 논리가 지배하는 철저한 자유경쟁 사회다. 게임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고 경쟁은 승리를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다. 가상공간에서는 현실 세계의 구질구질한 관행, 규제, 연공서열, 평등화 정책들이 여지없이 파괴된다.

실력이 뛰어나면 21세의 청년도 군주가 되며, 일단 군주가 되면 50세의 어른도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군주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조직은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상공간은 이러한 실력의 논리 위에 '실력의 윤리'를 요구한다.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가상공간에서 인재들은 끊임없이 유동한다. 군주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조직의 인간관계는 무너지고 인재는 떠나간다. 훌륭한 군주는 공과 사를 분별하는 질서 감각과 자기 희생의 봉사정신으로 가상공간에 가족보다 더 친밀한 조직을 만들어낸다.

◆ "군주의 고뇌"=가상공간은 모두가 똑같은 스타트 라인에서 출발해 자신의 아바타를 성장시켜 가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가상공간에도 무제한의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게임을 시작한 사람들은 나중에 시작한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든 경제적 부와 스킬(기술) 구사 능력, 정보, 경험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후발 주자들은 이 같은 불평등을 극복하고 다양한 도움을 받기 위해 커뮤니티에 가입한다. 군주의 고민은 이런 신입 회원의 욕구를 상당 부분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데 있다. 가상공간에서는 사용자가 공간 내에서 이동하면서 스토리가 생기는 만큼, 군주는 신입 회원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적극 돕는다. 이로 인해 사용자들은 게임을 시작할 때 부여받은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훨씬 부드러운 사회적 친교와 경제 활동을 하게 된다.

예컨대 캐릭터 육성 단계에 따라 한 마을씩 이동하게 되어 있는'길드워'를 보자. 초보자들은 최고 레벨, 최고의 스킬 봉인 해제자들만이 들어가는 중요 마을에 진입할 수가 없게 게임 시스템이 설계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길드워'의 세계에서는 레벨8, 레벨7, 심지어 레벨4의 초보자들도 중요 마을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최고 방어력의 갑옷을 입고 다닌다. 이것은 초보자들을 데리고 길드워 월드의 지름길을 달려 난이도가 높은 마을의 진입로를 뚫어주는 '택시기사'들 때문이다. 기사들은 이동 속도를 높이는 마법과 회복 마법, 방어 마법으로 무장하고 절묘한 마법 컨트롤 능력을 자랑한다.

택시기사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한 길드의 군주일 때가 많다. 나중에 시작하는 신입회원을 도와주기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시스템을 안정시켜야 하는 게임 개발사는 자연히 긴장했다. 그리하여 개발사는 지름길 곳곳에 다리 부상과 약화 마법을 거는 몬스터들을 배치해 길을 막고, 택시기사들은 다시 다른 지름길을 찾아내는 대결 구도가 한동안 지속됐다. 게임 안에서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 자체와 게임을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게임학자들은 이러한 양상을 '게이밍 게임(gaming game)'현상이라 부른다.

초보자 돌보기는 군주의 수많은 고뇌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커뮤니티 안에서는 말썽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소한 다툼이 조직과 조직의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면 군주는 PC 앞에서 밤을 새워야 한다. 상거래 사기 혐의를 받는 회원이라도 생기면 조직은 사회적 매장의 위기를 맞는다. 군주가 가져야 하는 고뇌와 행복은 가상공간 안에 커뮤니티가 존속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는 양면이다.

글=이인화 이화여대 교수
취재 및 연구보조=신새미.이영수

이인화 교수는

이인화(40) 교수는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다.

그는 문단의 멀티플레이어다.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992년) '영원한 제국'(93년) '인간의 길'(97년) 등을 펴냈으며 계간 '상상'의 편집위원(93~98년), 월간 'Emerge 새천년'의 편집위원(99~2003년) 등을 지냈다. '작가세계 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상 문학상' 등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그는 또 영화 '청연', 창작발레 '신시21', 설치미술 '아슈켈론의 개'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 온라인 게임 '리니지2' 칭기즈칸 혈맹의 군주였으며 차세대 온라인 게임으로 불리는 '쉔무'(2003년) '길드워'(2005년)의 스토리 구성에도 참여했다. 온라인 세상에서는 '몽골리안포스'라는 이름의 바람정령마법사로 이름을 날리는 세계 정상급 게이머이기도 하다.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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