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8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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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김일성 서울공산당 교란책/내부파벌 틈타 최창익 내세워 반 박헌영운동
우리 해방일보 편집국원들은 1주일에 각각 다른 주간신문 4개를 내게되니 편집아지트가 여러곳 필요했다.
우리 편집국원들이 직접 아지트를 구할수 없어 아지트를 구하는 전임 책임자까지 필요했다. 그 아지트 공작 책임자로 들어온 사람이 비밀당원 권태휘였다.
그는 안재홍이 해방전 조선일보사장으로 있을때 영업국장을 했으며 그후에도 비서역할을 했다.
나는 마침 해방전부터 권태휘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과 딸들과도 잘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나는 권태휘와 더욱더 친하게 되었다. 권은 나에게 굉장한 호의를 갖고 안재홍을 만나면 나를 좋게 얘기했던 것 같다.
결국 그가 나와 안재홍을 정치적으로 연결시켜 주게 되었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안재홍이 미군정의 민정장관이 되었을 때에도 일부러 인사하러 그를 찾아갔었다. 안재홍이 가장 신임하는 권태휘의 소개가 있었고 또 그와 나는 대학 선후배 관계였기 때문에 그러한 관계에서도 그는 나를 자기의 한가닥 힘으로 생각해 주었다.
안재홍과 나는 한국이 민주발전을 해 나가는데는 이승만과 한민당정권으로서는 안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는 50년 3월30일의 2대총선거때 안재홍을 극비리에 찾아갔다.
그때는 이미 김삼용ㆍ이주하ㆍ정태식등 남로당지하당 최고지도층이 다 전멸당하고 내가 그들의 뒤를 이어있을 때였다.
5ㆍ30총선에서 민심은 이승만ㆍ한민당계에서 떨어져 무소속의원이 과반수를 차지할 것이라는 남로당지하당의 정세분석을 안재홍에게 알려주고 제2대 대통령에 안선생이 입후보할 결심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한 일이 있다. 그 당시에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5월6일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되고 5월15일에 정판사위폐사건이 터지니 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6월3일 이승만박사는 지방조직 강화를 위해 전라도 여행중 정읍에서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수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해야 될 것이다』고 충격적인 연설을 했다.
이에 대해 공산당 및 인민당등 좌익정당ㆍ사회단체들은 일제히 『단독정부 수립을 획책하고 있는 자신의 정체를 폭로했다』고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남북을 각각 분단 점령하고 있는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실패하면 우리힘으로는 통일할 수 없는 것은 짐작할만한 일이었다. 이승만박사가『나가라』한다고 『예』하고 철수할 소련이 아니다.
통일정부를 수립못하면 자연히 남북에 각각 분단정부가 수립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남북에 각각 분단정부가 수립된다면 이남에는 미국이 지지하는 친미적인 이승만정권이 수립될 것이며 이북에는 친소 김일성정권이 들어설 것은 또한 자명한 일이었다. 때문에 분단정부수립에 가장 반대하는 세력은 보수진영에서 미국의 지지를 받지못하는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대한임시정부이며 좌익에서는 스탈린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서울의 조선공산당중앙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16년만에 겨우 재선된 공산당은 파벌이 복잡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나니 벌써 서울공산당안에는 김일성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배후의 소련과 중국의 후광은 물론 소련군이 북조선과 만주에서 몰수한 조선은행권과 일본은행권의 막대한 금력을 과시하면서 그의 교묘한 교란책을 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김일성이 서울에 손을 뻗치기전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이 유력하다는 눈치를 챈 서울의 기회주의자ㆍ파벌분자들이 먼저 제발로 김일성의 손아귀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고성흠ㆍ최성환ㆍ이영ㆍ정백ㆍ최익한ㆍ이청원등이었다.
이들의 보고에 의해 서울공산당중앙의 내부상황을 알게된 김일성은 중국 연안에서 돌아온 독립동맹의 최창익을 교란책임자로 내세웠다.
최창익은 조선공산당내 구ML파의 지도자중 한사람이었다. 경남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은 거의 ML파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부분이 최창익의 선에 걸리게 되었고 따라서 박헌영을 반대하고 김일성쪽으로 붙게되고 말았다.
이름난 사람만 몇사람 적어봐도 박용선ㆍ한인식(이상은 남해태생으로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 윤일(경남 도인민위원장ㆍ거제출신)강철ㆍ강병도(진주출신)정희영ㆍ하필원 (하동출신ㆍ하필원은 동거하던 여인 강정애가 평양에 가서 소련군 통역을 하고있었기 때문에 노골적인 반박헌영운동은 삼가고 있었다)
이우적ㆍ박낙종(산청출신ㆍ박낙종은 곧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파벌운동에 들어갈 기회가 없었다)등이었다. 이들은 절친한 동지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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