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칼럼

대통령의 선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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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무현 대통령처럼 '말'로 시빗거리가 되는 대통령은 일찍이 없었다. 아무리 말조심을 촉구해도 소용없음은 이미 판명이 났다. 주변 참모들도 말투나 단어 사용을 놓고 여러 차례 조언했고, 본인도 처음에는 어찌할지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답게" 대신 "노무현답게"로 낙착을 봤다는 것이다. 설령 문제가 생기더라도 특유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노무현 화법'을 고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취임 이후 아무리 언론이 대통령의 부적절한 말이나 표현을 비판해도 노 대통령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기가 편한 대로, 자기 식대로 거침없이 말해 왔다. 외교적 수사나 우회적인 표현은 개인적 취향에도 안 맞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말의 진실성을 떨어뜨린다고 여기는 대통령이니 말이다.

말만 조심했어도 대통령의 인기가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굴 탓할 일도 못 된다. 자신이 빚어낸 결과이니 말이다. 대통령의 말을 갖고 더 이상 시비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낭비다. 지나치게 도전적인 반어법을 쓰거나 다소 점잖지 못한 비유법을 사용한다 해도 노 대통령 특유의 유머라고 여기고 그냥 넘어가는 편이 옳지 않나 싶다. 대통령이 안 바뀌니 국민이라도 바뀌는 수밖에 없다. 최근의 해외순방에서도 예외 없이 시빗거리를 생산하고 있으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그렇지 않고서는 자칫 무정부 상태로 가지 않을까 걱정이다. 가뜩이나 레임덕 현상이 가속되는 판에 대통령의 말투에 매달려 허송세월할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해서라도 남은 임기나마 대통령 책무를 다하도록 해야 한다. "계속 시끄럽게 하겠다"는 발언도 책잡을 일이 아니다. 표현이 거칠어서 그렇지, "열심히 하겠다"는 노무현식 표현이 아니겠는가. 남은 임기는 아직도 길다. 대통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는 긴 기간이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사방을 둘러엎고 잔뜩 일을 벌여 놓은 마당에 수습은커녕 정권 막판에 더 뒤죽박죽이 된다면 그야말로 낭패다.

최근 텔레비전 인터뷰 중에도 억지 대목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선의를 의심하지 말아 달라"라는 대목에는 아무런 토를 달고 싶지 않다. 노 대통령의 진심이 듬뿍 묻어 있다고 믿는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정책을 두고 한 말이었는데, 정책에 대한 반대는 좋지만 대통령 자신과 정책 자체를 음모적인 시각으로 터무니없이 매도하지는 말아 달라는 뜻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이 "힘들다"고 한 말도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하긴 지칠 때도 됐다. 본인의 고백대로 너무 많은 것을 해보이려 했던 것이 오히려 일을 그르친 주된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말은 안 해도 선의(善意)만으로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무슨 정책이 가장 아픈 실패였는지, 무슨 판단이 가장 잘못됐는지를 지금쯤은 대통령 스스로가 충분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주가를 들먹이며 경제의 성공을 강변했지만, 한국 경제가 정말 얼마나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지를 경제 전문가 뺨치는 노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최대의 실패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주특기로 큰소리쳤던 노동문제였음도 절절히 통감하고 있을 것이다. 기필코 일궈내겠다던 사회통합은커녕 증폭된 갈등의 현실에 심한 허탈에 빠지기도 했을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내놓고 말 못하는 속 쓰리는 구석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나.

지금까지 판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기에 이를 가장 잘 수습할 인물도 바로 노 대통령 자신일 것이다. 인기야 떨어질 대로 떨어졌으니 더 떨어질 구석도 없다. 대통령을 자꾸 코너로 몰 일만 아니다. 대통령의 선의를 믿어보자.

이장규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