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책­너무 어렵고 두껍다(교육 이대로 둘 것인가:6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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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글 잘 모르는 중학생도 많아/“내용 보수적이고 서구편향” 일부 교사 비판
국어를 가르치는 조모교사(32ㆍ여ㆍ대구K중)는 지난 한햇동안 수업진행에 아주 진땀을 뺐다.
새로 개편된 「중학국어1」 교과서의 분량이 과다해 교과서를 끝마치기에 급급했다.
1학기 교과서 총2백18쪽,2학기 2백20쪽 등 모두 4백38쪽을 주당 4시간,연간 1백36시간으로 지도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더구나 학교행사ㆍ공휴일ㆍ시험시간을 제외하면 학생들에게 개편교과서가 요구하는 말하기ㆍ듣기ㆍ쓰기ㆍ읽기는 말할 것도 없고 언어능력신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고입선발고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부분적으로 입시위주의 교육방식도 활용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학기말에 가서는 본문은 학생 각자가 집에서 읽어오도록 하고 바로 본문 설명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본문의 내용 또한 생활과 동떨어져 있거나 시대성과 현실인식이 결여돼 있다고 일선교사들은 지적했다.
예를 들면 1학기 교과서 시와 운율 단원에 실린 현대시 5편을 작가가 활동했던 시기를 중심으로 보면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김영랑) 「해바라기」(윤곤강) 등 3편은 50년대 이전의 작품이고 「물새알 산새알」(박목월) 「풀잎」(박성룡)도 70년대 이전에 씌어진 것이다.
따라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75년 이후의 출생자들임을 생각할 때 그들의 생활이나 정서와는 뚝 떨어진다.
교사들은 이에 대해 『삶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올바른 인생관을 만들고 실천하면서 살게 한다』는 문학교육의 목표와는 거리가 먼 처사라고 입을 모았다.
김모교사(37ㆍ서울Y중)는 본문이 지나치게 어려운 것으로 선정돼 중1이 이해하기 곤란한 내용이 많다고 말했다.
단적인 예로 1학기 문학단원에 나오는 심청전 중 「공양미 삼백석」은 학생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중1로서는 처음 대하는 고어투의 한자체이기 때문에 그냥 한번 읽는다고 해서 내용파악이 다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내용파악만으로도 빠듯한데 교과서 지도서에는 고대소설의 특성까지 가르치라고 해놓았으니 편찬자들이 대상을 중1년생이 아니라 고1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김교사는 항변했다.
중학교 1학년 개편국어 교과서가 자본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있다고 「국어교육을 위한 교사모임」은 88년 11월 『우리말 우리글』 창간호에서 지적했다.
쓰기에 공통으로 나오는 예문과 물음을 보면 가난한 사람ㆍ성공자ㆍ실패자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제시된 예문자체가 실패자나 가난은 오로지 개인의 능력 차이에 따른 것이며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사회구조적 모순은 보지 못하게 하고 개인의 능력과 노력여하에 의해 가난과 실패가 규정된다는 것은 지배이데올로기의 묵시적 주입이라는 주장이다.
개편교과서에 실려 있는 글의 필자들은 대체적인 성향이 보수적민족주의자이거나 서구편향성을 갖는 인물들이라는 지적도 교사들 사이에서는 끊이지 않고 있다.
김진경 전교조 교과서위원장(37ㆍ전양정고ㆍ국어)은 『교과서 체제를 일본식에서 미국식으로 전환해 읽기ㆍ듣기 등으로 영역을 구분하고 언어습득ㆍ학습기능을 강화했지만 입시위주 교육풍토가 바뀌지 않고 있어 교육현장에서는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내용면에서도 정권홍보적인 내용이 조금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보수 일변도이며 특히 문학작품은 보수성향의 작가 것만 선정해 가장 심각한 분야로 생각된다』고 김교과서위원장은 덧붙였다.
올해 중2가 된 성모군(15ㆍ서울D중)은 중학교에 들어가 1학기초 부모 몰래 학교를 빠진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성군은 첫 국어시간에 읽기 지적을 받고 얼굴을 책에 파묻고 꼼짝않고 앉아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성군은 의무교육 6년을 마친 다음에도 한글조차 모르는 학생중 하나였다.
교과서 분량과 내용도 문제지만 이처럼 중학생중 한글 미해득자가 있는 현실도 국어교육의 맹점이라고 일선교사들은 말했다.
성군은 다행히 1학기 6개월 동안 방과후에 국어교사의 개인지도로 가나다를 익혔다.
서울 A중의 경우 1ㆍ2ㆍ3학년 모두 합쳐 한글을 읽지 못하는 학생이 1백여명에 달한다.
『한글을 모르는 학생은 새학년을 맡은 첫날에 발견된다. 소리나는 대로 뜻을 파악하기 힘든 문장을 적는 경우,조사를 빼고 적거나 심하면 암호와 같이 문장을 아무렇게나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천 A중 정모교사(30ㆍ여ㆍ국어)는 가정의 무관심과 학교의 집단적ㆍ획일적 교육이 국민학교 시절 시험지에 OㆍX를 그리면 끝나는 시험을 수십번 경험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교육전문가들은 유치원과 국민학교에서까지 난리들인 조기 영어공부보다는 국어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모두가 깨달아 중학교에 진학해 한글 미해득으로 수업중 계속 버림받고 질시와 조소를 받는 현실이 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도성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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